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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나를 슬프게 해 줘 (10-12-토, 맑음) 본문

일상

나를 슬프게 해 줘 (10-12-토, 맑음)

달빛사랑 2024. 10. 12. 19:39

 

오전에 수필집 의뢰인이 전화해 구구절절 푸념을 늘어놨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테니 윤 대표를 설득해 다시 발간 작업을 마무리 짓도록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내 목소리도 잠깐 높아졌다. “선생님, 왜 안 하겠다는 사람과 굳이 일을 하려고 하세요? 선생님의 지인 중 책을 낸 분들이 많다면서요?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세요.” 했더니,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그 친구들은 서울 살기 때문에……, 제가 이제 늙어서 차를 오래 운전하질 못해요. 서울까지 오고 가는 일이 제게는 벅차요” 하며 동정심에 호소했다. 대개 그런 식의 대화가 한 시간이나 이어졌다.

 

인내심이 점점 바닥났으나, 한편으로는 또 안타까운 생각도 들어서 “선생님의 말씀은 알겠으나 출판을 재개하는 건 출판사의 판단이에요. 그런데 윤 대표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힌 이상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설득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요” 했더니, “그래도 윤 대표가 나보다는 문 선생님과 친하잖아요. 그러니 설득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며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물론 다시 작업이 진행되는 게 나로서도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작업한 수고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 입은 윤 대표가 말을 번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싫다는 윤 대표를 설득하고 싶지 않다.

 

이분은 자신의 책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홍보와 마케팅까지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는데, (자신의 책을 팔아 이익을 남기겠다는) 이런 황당한 생각이 아마도 윤 대표를 기함하게 만든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짜증과 인내심의 한계를 간신히 억누르며 나름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혔다. 통화를 마칠 때쯤 그는 “고맙습니다. 문 선생님. 저는 문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선생님께는 오히려 미안할 뿐 서운한 맘이 전혀 없어요. 다만 답답해서 하소연 한번 해봤습니다. 죄송합니다.”라며 나중에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속으로 ‘윤 대표를 마지막으로 한번 설득해 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오후에는 연수동에 볼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화했다는 은준의 연락을 받았다. 요즘 지출이 많아서 사람 만나는 걸 자제하고 있었지만, 사나흘에 한 번꼴로 전화하던 친구가 요즘에는 비교적 연락이 뜸했던 터라서 저녁 먹을 요량으로 우리 동네에서 만났다. 마침 집 근처 대로에서는 남동구 마을 축제가 진행 중이어서 둘이 재미 삼아 둘러보았다. 수십 개의 부수마다 동 이름과 동아리 이름들이 붙어 있었다. 중앙 무대 뒤편에서는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들 십여 명이 어디서 구했는지 여고 시절 교복을 입고 대기 중이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소녀들처럼 밝아 보였다.

 

은준과 나는 차를 통제하여 행사장으로 사용하는 도로 끝까지 이어진 부수들을 둘러본 후 다시 주무대 쪽으로 올라오며 어디 갈까를 고민하다가 만수1동성당 뒤쪽의 횟집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깔끔했고 음식도 좋았다. 가격도 저렴했다. 그곳에서 광어회와 매운탕을 안주로 소주 3병을 나눠마셨다. 2차도 근처 횟집에서 했는데, 이전에 은준, 혁재와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던 그곳에서는 물회를 먹었다. 그 횟집은 물회 전문 횟집이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물회를 정말 오랜만에 먹었다.

 

2차에서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둘이 소주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남겼다) 대화만 나눴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라서 그야말로 ‘안주발’을 많이 세운 셈이다. 축제를 끝낸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할 때쯤 그곳을 나와 집에 왔다. 은준은 (술은 마시지 않고) 집에 있던 포도와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로얄샬루트 21년산이 있었지만, 어차피 다 마시지 못할 게 뻔해서 다음에 만나서 마시기로 했다. "딸까?" 했을 때, 은준은 "아니, 따지 마세요. 다음에 마셔요" 하고 말렸다. 귀가하는 은준을 배웅하고 돌아와 식탁을 정리한 후 곧바로 한 시간 자전거를 탔다. 아랫배가 유난히 볼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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