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몹쓸 기억 도둑ㅣ눈꽃을 찍다 (12-15-목, 눈 내리고 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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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기억들이 모래주머니에서 모래가 빠지듯 사라지고 있어. 기억 도둑이 있는 게 분명해. 애초에 기억이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허다한 사건 중 그 (경험) 당시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간직해 온, 사실과 경험에 관한 이미지들이야. 비슷한 일을 경험해도 서로 다른 기억을 품게 되는 이유는 의식의 작동이 매번 똑같지 않기 때문이지. 이런 의미에서 기억을 도둑맞는다는 건 특정 시기의 내 역사, 그 한 덩어리가 뭉텅 사라지거나 괄호에 갇힌다는 걸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어. 죽으면 그뿐이라고 쉽게 말하면 안 돼. 고립된 섬에서 홀로 살아가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면 한 인물 죽음과 기억의 멸실은 분명 그가 살던 사회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법이거든. 기억이 사라지면 추억도 함께 사라지지. 촘촘하고 빈틈없이 맞춰진 삶의 퍼즐에 빠진 조각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조각들이 빠져나간 휑한 구멍으로는 삶의 공허와 환멸이 들어차지. 그러니 기억을 시나브로 도둑맞고 있는 나는 얼마나 불안하고 안타깝겠어? 하여, 기억 도둑을 잡아볼 생각이야. 쉽지 않겠지. 덫을 놓아볼까. 과연 교활하고 재빠른 기억 도둑이 나의 엉성한 덫에도 걸려들까? 요즘 남은 기억을 살살 달래고 있어. 추억이라는 훈장을 달아주며 곁에 머물러달라고 애원하는 중이야. 당신이 내 기억 도둑을 잡아준다면 나는 당신에게 내 영혼을 줄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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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지나면서 많은 눈이 내렸다. '많은'이라고 했으나 성에 차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작정하고 나가서 치워야 할 정도로 쌓였다는 의미에서 '많은 눈'이다. 내리는 줄도 몰랐다. 겨울철 거실 베란다 문은 환기할 때 말고는 대개 닫혀 있어서 밖을 볼 수가 없다. 청소하느라 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내리는 눈발을 보았다. 성긴 눈발이었다. 한차례 거세게 쏟아진 후 잦아들기 시작한 눈인 것 같았다. 테라스에 나가보니 눈은 제법 쌓여 있었다. 오후 두 시가 지나며 눈은 완전히 멈췄다. 옷을 챙겨 입고 나가 계단부터 눈을 쓸어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 모자를 벗자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문밖으로 나가 어린이집 입구까지 눈을 치웠다. 거리의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갔다. 여고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눈싸움을 하는지 집 앞 문일여고 쪽에서 학생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다운 눈을 만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렇게 눈 내린 날, 엄마는 하늘나라에 드셨다. 눈 치우면서 엄마 생각에 잠깐 울컥했다. 테라스 쌓인 눈 위에 눈꽃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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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쯤 선아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말은 없고, 수화기 너머로 혁재가 내 시에 곡을 붙인 '다시 잠 못 드는 밤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화마을에서 술 마시며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선아는 "이 노래를 들으니 형님 생각이 나서요. 잠깐만, 형님 친구 바꿔줄게요." 하며 사진작가인 친구 임기성을 바꿔주었다. 의례적인 안부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았다. 동화마을 은수네 집은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다. 혁재는 당분간 그곳에 머물며 장사를 할 것이다. 갈매기에서 그를 만나기는 더욱 어렵게 됐다. 혁재가 없다면 나도 갈매기에 가는 일은 그만큼 줄어들겠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로서는 술을 덜 마시니 좋은 일인 것 같고, 혁재는 장사를 핑계로 지인들과 더욱 잦은 술자리를 가질 테니 나쁜 일인 것도 같고.... 하긴, 혁재야 동화마을 아니더라도 늘 술 속에 젖어 살았을 테지만...... 외로운 사람끼리 더불어 지내며 이 겨울을 따뜻하게 통과했으면 좋겠다. 겨울은 늘 우리를 겸손하고 너그럽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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