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보다 (12-04-일, 맑음) 본문
런던에 사는 노부부 톰(지리학자)과 제리(심리 상담사)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그로 인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 퇴직을 앞두고 삶의 기쁨을 찾지 못하는 톰의 친구 켄 등 톰과 제리 부부는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의 외로움과 슬픔, 기쁨과 행복에 공감하며 그들의 벗이 되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조이가 여자 친구 케이티를 소개하는 자리에 갑자기 메리가 찾아오고, 그녀는 그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조카뻘인 조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어왔던 메리는 혹시 케이트로 인해 자신이 제리 부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 같은 불안감에 사사건건 케이티의 말꼬리를 잡고 급기야는 그녀를 험담하기에 이른다. 그런 메리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제리 부부는 메리의 행동에 실망하고 20년 넘게 이어져 온 두 사람의 우정에도 균열이 생긴다.
특히 아내를 먼저 보낸 제리의 형 로니가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제리의 집에 잠시 머물 때, 우연히 제리의 집을 찾은 메리와 조우 하는데, 이때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메리의 외로움과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메리 역을 연기한 레슬리 맨빌의 공허한 표정과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는 데이비드 브레들리(로니)의 연민 어린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카메라는 메리의 슬픈 눈빛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다. 결국 메리는 행복한 사람들 틈에서 한결같이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남게 된다. 화목한 가정, 사랑이 넘치는 부부 사이에서 메리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메리를 기꺼이 가족처럼 받아들여주었고, 애정을 나눠주었으며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해주었다. 그들의 사랑과 온정은 분명 소중하고 따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제리와 톰 부부, 조이와 케이티 등)은 자신들이 베푸는 사랑과 보여지는 행복이, 사랑을 갈구하는 메리에게는 오히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거나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 그래서 메리의 절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리 상담사인 제리가 친구 메리의 절망과 외로움을 읽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결국 메리는 구원되지 않았다. 메리의 외로움과 절망은 여전히 그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을 뿐.
이 영화는 4계절을 기준으로 서사가 진행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비유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상과 계절은 가끔, 평온한 표정 뒤에 숨었던 날카롭고 잔인한 발톱을 드러낸다. 누구에게나 계절은 찾아오지만 각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은 서로 베거나 베이지만 삶은 계속된다."는 이형석 평론가 말에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행복은 결코 전이될 수 없으며, 본인의 행복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일 뿐이라는 마이크 리 감독의 냉철한 주제 의식은 시종일관 관객들을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행복을 가장(假將)하는 것도 위선이지만, 행복을 과장(誇張)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 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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