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고독은 나의 힘 (11-21-월, 오후부터 흐려짐) 본문

일상

고독은 나의 힘 (11-21-월, 오후부터 흐려짐)

달빛사랑 2022. 11. 21. 00:14

 

 

아침, 버스 정거장 주위로 비둘기 한 무리 날아와 연신 머리를 끄덕거리며 뭔가를 쪼아먹고 있었다. (무엇을 쪼아먹고 있는 거지?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분주하게 움직이는 비둘기의 부리가 겨냥하는 게 무엇인지 늘 궁금하다) 사람들이 다가와도 살짝 자리를 비켜줄 뿐 날아가진 않았다. 저쪽에서 미화원 아저씨가 비질을 하며 오자 비로소 일제히 해 뜨는 방향으로 날아올라 전신주 위에 살포시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나에게 비둘기의 편대 비행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때의 비둘기들은 버려진 과자 부스러기나 취객의 토사물 주위를 얼쩡거리던 볼품없는 새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로 비상할 줄 아는 야생의 새들이었다.

 

본성대로 산다는 것이 그리 멋진 일일 줄이야. 날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날 필요가 없어서 날지 않은 것이다. 순치된 비둘기에게도 본성은 남아 있었다. 이미 오래전, 평화의 상징성을 상실한 채 볼품없고 귀찮은 존재로 전락한 비둘기의 모습은 휘황한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시인을 닮았다. 문득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가 생각났다. 비둘기가 때때로 발현하는 본성대로 비상한 것이라면, 시인은 무엇을 계기로 추문 많은 시대의 공격을 이겨내고 건강한 세상을 위해 힘차게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 ‘말(言)의 사원(寺)’인 시(詩)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고독 속에 침잠할 일이다. 말의 사원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판관이고 사원(寺院) 그 자체인 시인도 마찬가지. 시인은 고독을 주식 삼아, 그것을 질겅질겅 씹어먹거나 고독으로 이불을 만들어 덮고 잘 일이다. 말의 사원에는 통로가 많아서 들어오기도 쉽고 나가기도 쉽다. 사원으로 들어온 말들 중 일부는 고독을 효모 삼아 숙성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의미를 품은 채 세상 밖으로 나가지만 고독을 거치지 않은 대부분의 말들은 흔하고 진부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간다(버려진다). 고독은 나의 힘, 내 ‘말의 사원’을 지탱하는 주춧돌.


오후에는 H가 전화를 걸어 오늘 있었던 재단 고위직 인사에 관한 불만을 하소연했다. 행사가 있어 부평역에서 문화의 거리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전화하고 있다며, 가끔 숨을 헐떡였다. 사람이 모여 뭔가를 도모하는 조직에서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기 때문에 H의 이유 있는 불만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H가 말하는 사람은 나도 잘 아는 후배라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H가 말하는 '그 후배'는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리더십도 있고 큰 사업을 진행한 이력도 만만찮다. 따라서 능력 부족을 이유로 불만을 토로했다면 나는 분명 H를 설득하려 했거나 반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사가 이루어지는 이면의 진실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그 방식은 분명 민주적이라 할 수 없기에 상당 부분 듣거나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배들은 언제부터인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음모적인 정치 행정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선배로서 그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몇 명이서 도모해 문화 예술 현장의 헤게모니를 좌우할 수 있다면, 그 문화판은 얼마나 빈약한 것이란 말인가. 그곳에 많은 것을 걸고 악조건 속에서도 분투하는 수많은 예술가와 문화 활동가들이 있는데, 그들의 상실감은 어쩔 것인가. H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장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혹은 순수성을 훼손당한 예술의 비명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온 나의 직무유기를 생각했다.


[취중췌언, 갈매기에서]

인간에 관한 예의를 생각한다. 월요일, 습관처럼 주점 갈매기를 찾는 것도 내 방식에서는 인간에 관한 예의다. 오늘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 이를테면 단골집을 공유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청 직원들, 근직이 내외, 나의 사랑 혁재, 존경하는 조구 형, 그리고 후배 K와 함께 갈매기를 찾은 ○○구청 직원들 모두 내 예의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갈매기를 찾은 다양한 이들과의 번잡한 만남을 통해 종종 나의 외로움을 은폐하곤 하는데, 그 '은폐 행위'도 내 예의의 범주를 넘어서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아슬아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름답다.' 이 '아름답다'라는 자의적 인식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아홉 켤레의 구두'다. 물론 나는 '다만'으로 시작해서 '결국'으로 끝나더라도 흔하고 사소한 관계에 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관계망 속으로 힘겹게 들어가려 애쓰고 싶지는 않다. 어쩔 것인가. 나의 자존은 애초부터 내 것이고, 결국 내 것이며, 끝끝내 내 것인 것을. 하루를 살더라도 백 년의 자존감으로 살 일이다. 생각해 보라. 저 허방다리 위에서 제것이 아닌 지위와 명예와 권력에 영혼을 저당잡힌 저들에 비해 당신과 나는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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