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후배들과 술자리 (수요일) 본문

인천 연극판의 살아 있는 화석인 재상이와 나의 아픈 손가락 S와 H 등 후배들을 만났다. 재상이는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잘하며, 감수성도 예민하다. 아는 것이 많다 보니 무척 다변이다. 다변이긴 하지만 쓸데없는 말을 하는 법은 없다. 고등학교 때 결핵으로 인해 한 해 휴학하고 복학하여 학교를 다니다 스스로 자퇴했다. 학벌 중심 사회에서 그는, 그가 지닌 능력치와는 별개로 많은 유리천장을 뚫어야만 했다. 최종학력 고졸이라는 스펙이 감당하기에 우리 사회의 편견과 제약은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력으로 그 모든 것을 돌파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연극협회 회장에, 극단 대표, 문화예술계의 오피니언이 되기까지 그는 오로지 실력과 성실함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었다. 시도 쓰고, 희곡도 쓰고, 연극도 만들고, 배우도 하고, 가끔 기타를 치며 공연도 하는 다재다능한 그도 이제는 어언 60을 문턱에 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열정적이고 현장에 발 딛고 있으며 인천의 모든 문화 예술의 현안에 현직으로서 관여하고 있다. 존경스러운 후배다.
S와 H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알아주는 수재였다. 서울대 출신의 부모 밑에서 엄격하게 성장하던 그는 고등학교 들어와서 적잖은 일탈을 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의 일탈이라고 해봐야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 정도였겠지만, 완고한 부모 밑에서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그에게는 그조차도 엄청난 일탈이었을 것이다. 상훈이 역시 감수성이 예민하고 박학다식하며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다. 남들 눈치 보는 성격이 아니라서 가끔은 상대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 얄밉게 보일 때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 평균치의 일탈 탓에 부모의 기대인 서울대 입학은 하지 못했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해서 나의 후배가 되었다. 물론 점수에 맞춰 서울대의 비인기학과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미련 없이 연세대를 택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해서 80년대 중후반에는 감옥도 다녀왔지만, 학생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서클에서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교내 운동권에서 나와 S는 접점이 없었다. 제고 연대 동문회 신입생 환영식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를 비롯한 한 학년 후배들이 하도 가열차고 어처구니없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어 선배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다가 페이스북에서 그를 만났고, 이후 자주 만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학원을 운영하다 말아먹고 이후 시작한 여러 가지 일들도 여러 악재들로 인해 지리멸렬해지자 그는 한동안 룸펜으로 지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혼을 하고 부모님들도 건강이 악화되어 현재는 여러 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의 '아픈 손가락들' 중에서 가장 통증이 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현재 아버님은 요양원에 계시고, 어머님은 치매를 앓다가 길병원 중환자실에서 입원해 계신데, 상황은 무척 안 좋다고 한다. 옛말에 재주가 많으면 고생한다고 했는데, 딱 S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싶다. 정말 똑똑하고 아까운 후배다.
H 역시 고교시절 전교 1, 2등을 하던 수재이다. 서울대를 나왔고, 사업을 하고 있는데,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그에게는 자폐스펙트럼을 앓고 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맹렬하게 아버지를 거부해 부인과 별거 아닌 별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거부하는 이 예사롭지 않은 현실 때문에 그의 표정은 늘 어둡다. 현재는 고교 동창인 S와 더불어 모종의 일을 도모 중인 모양인데, 그들이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는 묻지 않아서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시사잡지 영업(가끔은 인터뷰도 하고 기사도 쓰는)과 관련된 일이라는 걸 눈치로 알 뿐이다. H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몰이'를 당하는 편인데 (악의는 없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언짢은) 그래서 그런가 나를 만나면 소년처럼 애교를 떨며 몸을 밀착해 온다. 그럴 때 만나는 그의 선한 표정은 영락없이 소년의 해맑은 표정이다.
오랜만에 갈매기에 가지 않고, (갈매기의 경쟁 술집인) '인천집'에서 술을 마셨다. 월요일, 갈매기에 들렀을 때 종우 형에게 오늘은 아마도 인천집에서 술을 마시게 될 것 같다고 말을 해놨다. 안주는 확실히 인천집이 먹을 게 많았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문한 낙지볶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낙지가 물이 안 좋았던 것이다. 단골인 S가 사장에게 말을 하니 깜짝 놀라며 수거해 간 후 다시 새롭게 요리해 내왔다. 안주가 싱싱하고 맛있기로 소문난 인천집으로서는 갈매기 단골인 내 앞에서 망신스런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상합탕과 감자전 등 나머지 안주들은 맛이 좋았다. 술값으로 11만 9천 원을 계산했다. 선배는 피곤하다. 술꾼들 사이에는 '불러낸 사람이 우선 계산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오늘 술자리도 후배들이 만든 자리라서 굳이 내가 계산하지 않다도 될 일이었는데, 얻어먹는 게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선배였고, 무엇보다 고정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계산한 것이다. 물론 진심인지 치레인지 알 수 없지만, S는 "왜 형이 계산했어요?" 하며 정색을 하긴 했다. 사실 약속 장소로 나오면서 이미 나는 내가 계산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곳을 나와 재상이와 술 취한 H는 먼저 귀가하고, 나와 S는 근처 '비틀즈'에 들러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한 시간쯤 앉아서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피곤이 몰려와 그곳을 나왔다. 비틀즈의 술값은 5만 2천 원, 오늘 하루 17만 원을 술값으로 지출한 셈이다. 하루 술값치고는 다소 과도한 금액이다. 당분간 소비를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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