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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 '회복기의 노래'...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다 본문

일상

송기원, '회복기의 노래'...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다

달빛사랑 2019. 10. 19. 20:43


 

회복기의 노래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 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습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內譯)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 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 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 오르지.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死者)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溺死)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 묻은 환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 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 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 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 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수천수만의 빛의 살들, 쏟아진다. 직립한 모든 것들의 이마와 기지개 위로 일제히 꽂힌다. 폭포보다 현실적인 가속(加速)으로, 불면의 현기처럼, 쏟아지며 꽂힌다. 내가 견딘 지난밤의 당연한 아연함과 익숙한 쓸쓸함 위로, 위로처럼 쏟아지고 꽂히며 밟힌다. 오랠 것이 분명한 기다림과 포기할 수 없는 기대와 가엾은 자책 위로 변명처럼 쏟아지고 송곳처럼 꽂히다 끝내는 상심한 심장에 화인(火印)이 된다. 집요한 욕망처럼, 허망한 다짐처럼 깊고 선명한 상처가 된다. 가을의 저 화려한 빛의 살들과 공기의 결들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될 일이다. 현실적인 가을. 현실은 힘이 세다. 생각보다 완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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