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시립극단 정기공연 <해무>를 관람하다 본문
운동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시립극단 배우 강성숙이 초대권이 있으니 연극을 보러오라는 것이었다. 작품은 인천시립극단 정기공연작 <해무>. 사무실에 나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예술회관으로 갔더니 성숙이는 마임배우 이경렬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극 <해무>(김민정作)는 극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것에 대해 반응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연극이다. 10여 년 전 극단 연우무대의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공연되었을 때 평단으로부터 차범석의 <산불>을 계승하는 사실주의 연극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얼마 전인 2014년 심성보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연기파 배우 김윤석과 아이돌 출신 배우인 박유천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만들어지고 했지만 연극만큼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해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황(釣況)이 좋지 않은 봄, 여름을 보내고 가을 출항에 나선 전진호 선원들은 만약 이번 출항에도 별다른 어획량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배가 고리대금업자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부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조업을 계속한다. 하지만 번번히 빈 그물. 결국 선장은 밀입국자들의 밀항을 돕는 운반선 역할을 제안받고 그것을 수락하게 된다. 물론 선원들 내부에서 이견(경구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이 제출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그러한 결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필연이었다. 결국 조선족 밀입국자들을 은밀하게 태우고 항해를 하는 도중 해경들의 훈련이 시작되어 귀항이 지연된다. 그 과정에서 조선족 밀항자들과 어부들 사이에는 술자리가 마련되기도 하고 서로의 사연을 들으며 아픔에 공감하기도 하며 인간적으로 친밀함을 느낀다. 선원 동식과 조선족 처녀 홍매 사이에는 야릇한 연애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해경의 불심검문이 시작되자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밀항자들을 어창에 숨기고 먼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거센 태풍을 만나게 되고 바람이 잠잠해진 후 어창을 열자 조선족 밀항자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손가락 끝이 뭉그러지도록 어창 바닥을 긁어댔으나 바람소리에 그들의 아우성소리는 묻혀버리고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다행이 홍매는 동식이와 기관실에서 대화를 나누느라 어창에 들어가지 않아 목숨을 건지지만…….
전진호 선원들은 이 황망한 상황 앞에서 말을 잃는다. 그러다가 선장의 지시로 모두 수장을 시키기로 하는데 바다로 던진 시신들이 자꾸만 물 위로 떠오르자 상어밥이 되도록 시체에 피를 내자고 제안하는데, 모두가 기피하는 이 일을 완호 영감이 묵묵히 수행한다. 그는 마치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듯 비장하게 그 모든 일들을 마치고 술에 젖어든다. 그리고 전진호는 점점 짙어오는 해무를 만나게 된다. 그 해무 속에서 갑판에 앉아 술을 마시던 완호 영감은 다시 한 번 시신들의 원혼을 진혼하는 사제처럼 넋들과 대화를 하며 갑판을 떠돈다. 결국 환영들의 난무에 혼란스러워 하던 완호는 바다로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 이후 기관실에 있다가 끌려나온 홍매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다른 선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협에 직면하지만 그녀를 사모하는 동식이 “살려주세요. 비밀 지킬게요. 홍매와 난 결혼할 거예요.”라는 눈물의 호소를 하게 되고, 선장의 마음을 움직여 홍매는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경구의 조종을 받은 창욱은 홍매를 강간하기도 한다. 그렇게 안개 속을 표류하던 전진호 선원들은 어느 순간 해경의 정지명령 소리를 듣는다. 해경의 서치라이이트가 갑판을 환하게 비추며 사이렌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가운데 공연은 끝이 난다.
결국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무’ 즉 안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세상의 현실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바다라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전진호’라는 제한된 공간은 인간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극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간적으로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황적으로도 안개가 자욱하거나 모진 바람이 불어대는 상황은 아마도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방식과 고난을 대하는 자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삶의 모습을 보이거나, 주견 없이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포용하고 중재하는 모습을, 또 어떤 이는 방관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인간군은 실상 현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간의 유형들인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아래와 같은 원작자의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다에서 만난 짙은 안개를 해무라고 한다. 바다에서 바람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안개이다. 파도에는 길이 있고 바람에도 길이 있으나 안개에는 길이 없다. 짙은 해무는 어부들의 조각난 마음은 물론 바다와 하늘의 경계조차 허문다. 남은 것은 한없는 무기력과 끝을 알 수 없는 정체와 고립,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공포.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길을 잃는 것, 그것이 해무가 주는 공포이다. 어둠 속에선 불을 밝히면 되지만 빛 속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 김민정 작가의 <해무> 시높시스 중에서
그렇다. 그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한다. 술을 마시고 싸우고 화해하고 취하고 다시 싸우고 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인간 세계에서처럼 전진 호 안에도 다양한 갈등과 인간 군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술에 취해 접신한 듯한 완호 영감처럼 사제의 역할을 담당하는 캐릭터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아수라 같은 현실을 상징하는 전진호의 상황,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 그리고 현실에서처럼 존재하는 죽음, 그 죽음을 조상하는 사제, 그렇다면 전진호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그악스런 현실의 축소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연극 <해무>를 관극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치부와 상처를 헤집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인물에 이입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게 될 때 관객들은 무척이나 불쾌하고 곤혹스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이 연극이 목표로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아픔의 원인에 대한 구체적 천착과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추체험을 통해서 과연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확보되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더 나아가 본능을 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이,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짐승의 삶과 어떤 점에서 변별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소 불편한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마치 난파된 낡은 어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실감나는 무대와 디테일한 소품, 멀미가 날 정도로 생생한 바다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관객들은 실제로 바다 위에 떠있는 착각을 하게 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뱃사람들이 지독한 고난과 싸우는 현장을 지켜보며 삶의 멀미를 함께 느끼고, 마치 한 배에 탄 듯 그들의 처지에 점차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오마이뉴스 11월 22일자 박봉민 씨의 기사 참조) 강량원 감독의 말처럼 무대장치들은 매우 실감났다. 특히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 무대인 전진호 갑판을 객석에 볼 때 경사지게 만든 것은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다.
시립극단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와 자신만의 주제의식과 개성이 배어 있는 연출, 디테일이 살아 있는 실감나는 무대들이 극적 시너지를 이루어 웰메이드 연극 한 편을 만들어 냈다. <해무>는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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