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시립극단 정기공연<열하일기만보> 본문
인천시립극단 정기공연 <열하일기만보>
◎원 작 : 배삼식
◎연 출 : 강량원(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공연일 : 2017-04-07~2017-04-16
◎시 간 : 평일 저녁 7시30분, 토요일 오후 4시 일요일 오후 4시
◎장 소 :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관람료 : 전석 20,000원
<공연문의 : 인천시립극단 032)438-7775>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와서 저술한 여행기 <열하일기>가 연극 <열하일기만보>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조 1780년(정조4)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는데, 연암은 한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열하까지 총 3000리길을 여행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가장 기이하고 괴상한 볼거리를 열하에서 보았다!”
대산문학상, 동아연극상을 수상한 <열하일기만보>는 박지원이 열하(연극의 공간적 배경)에서 말(馬)로 환생한다는 엉뚱한 상상으로 시작한다. 이 연극은 꼼짝달싹 못하는 삶의 굴레에서 달아나는 방법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제안하고 있다. 20명의 배우들이 펼치는 서커스와도 같은 이 연극에서는 기상천외한 소동이 끝없이 펼쳐진다. 말(馬)이 갑자기 말(言)을 하고 낙타가 염불을 하는가하면 호랑이가 포효한다. 소동을 막으려고 더 큰 소동을 일으킬 때 연극은 마치 버라이어티 서커스처럼 배우들의 연기로 뜨겁다. 배우들이 신체로 표현하는 화려한 스펙타클! 관객은 어느새 박지원이 감탄에 마지않던 도시, 세상의 많은 다른 문화가 공존하던 ‘열하’로 인도되는 것이다.
연극은 열하’라고 불리던 어떤 마을에서 말 한 마리가 인간의 말(言)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 마을에서 키우는 말 한 마리가 갑자기 인간의 말(言)을 시작한 것이다. 그 말(馬)은 다름 아닌 전생에 ‘열하일기’를 썼던 연암 박지원 선생의 환생.
연암이라는 말(馬)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열하일기‘에 기록된 바깥 세상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러자 주민들은 마을에서만 고립되어 살아온 삶에 의문과 의구심을 갖고 마을 밖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관습과 제도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을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현상이기 때문에 촌장과 장로들은 이러한 흐름을 잠재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하지만 이미 변화의 바람에 마음을 빼앗긴 마을사람들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한편으로 마을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마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려는 찰나 따라하기 힘들 만큼 긴 이름의 직책을 가진 ‘어사’가 마을에 도착한다. 어사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마을에만 있는 ‘독특한 것’을 모으는 관리이다. 어사는 이 마을도 ‘독특한 것’을 바치라고 말하고 만약 독특한 물건을 내놓지 못하면 지도상에서 마을을 없애버릴 거라고 협박한다. 주민들은 자신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을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다 할 신기한 물건을 찾을 수가 없어 주민들은 실의에 빠진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신의 고환을 잘라내기까지 하는데, 그때 말(馬)이 “이 척박한 사막의 땅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땅을 찾아서 떠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떠나지 않고 결국 어사에게 말(言)하는 말(馬)을 내준다.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과 미래를 꿈꾸게 해준 ‘독특한 것’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어사가 떠나고 주민들은 다시 평온한 그러나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옛날로 돌아간다.
배삼식 작가의 창작 희곡인 <열하일기만보>는 사실 이미 오래 전에 무대에 올려진 제법 연조가 있는 작품이다.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후 <열하일기만보>를 첫 작품으로 선택한 강량원 감독은 “무엇보다 희곡이 지닌 신선하고 재밌는 부분을 관객에게 잘 전달하는 게 관건”이라며 “꼼짝달싹 못하고 삶의 굴레에 묶여있는 우리 인생에 대한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우화”라고 전하기도 했다.(팸플릿 참조)
누구나 경계선 안에 안주하려고 하면서도 본능처럼 내면에 품고 있는 인간의 호기심과 기이한 것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연암 역을 맡은 시립극단 배우 김현준은 인간과 말(馬)을 오가는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연기자가 출연하는 연극이었으므로 배우들의 동선과 공간활용이 상당한 고민거리였을 거라 생각되는데, 감독은 이 문제를 5단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무대를 통해서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배우들은 손동작 하나에서 얼굴표정까지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이는데, 보는 이에 따라 다소 오버액션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역동적인 느낌을 주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가 생각보다 긴 공연시간(꼬박 두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념의 생성과정을 우화적으로 처리하거나 소문들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매몰되게 만드는지, 그리고 고착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사실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등등 현대사회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정보의 유통과 사람 사이의 소통 문제를 ‘열하’라는 공간과 말하는 말의 등장이라는 소재를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해 낸 꽤 신선하고도 흥미진진한 그러면서도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웰메이드 연극 한 편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배삼식과 손진책의 유유자적 고전읽기
-극단 「미추」의 <열하일기만보>
김미도(연극평론가, 서울산업대 교수)
<열하일기>를 연극으로 만난다? 기이한 원전만큼이나 참 기이한(?) 발상이다. 그 방대한 저작을 어떻게 연극화할 것인가? 극단 「미추」의 <열하일기만보>(熱河日記漫步, 3.10-25, 토월극장)는 소인배들의 기우를 여유만만 비웃으며 새로운 각도의 고전 읽기를 시도한다.
작가 배삼식은 애초부터 기행문의 여정을 따라간다든지,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다든지, 현학적 담론을 펼쳐 보이는 따위의 상식적 구성을 덮어버렸다. 그는 <열하일기>가 던져주는 가장 큰 화두와 이미지, 연암사상의 정수만을 오롯이 건져 올렸다. 원텍스트는 그에게 강렬하고 아름다운 모티브를 제공해 준 차원에 머물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중 장소는 오히려 한 곳으로 고정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먼 미래의 사막 한 가운데에 작은 마을이 있다. 수시로 모래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탓에 밧줄을 잡고 걸어야 겨우 방향을 가늠할 수 있고 늘 보안경을 쓰고 지내야 한다. 이 마을에 전생의 연암이 말도 아니고 나귀도 아니고 노새도 아닌 어중간한 동물 ‘미중’이로 환생하여 살고 있다. 미중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큰 혼란에 휩싸인다. 미중의 말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만 사유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계내계외기사기물총람순력어사’라는 괴상한 직책의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황제의 명으로 세상의 온갖 기이한 것들을 수집하고 다닌다. 기이한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지워질’ 위기에 처하자 기이한 것을 찾아 난리법석을 떤다. 마을 장로들에 의해 말이 금지되었던 미중은 다시 말 하기를 강요받고 마침내 ‘지워지기 전에 지워버리라’는, 즉 마을을 떠나자는 혁명적인 제안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국 떠나지 못하고 대신 미중이를 어사에게 넘겨준다. 사람들은 다시 모래폭풍의 일상에 묻혀 황폐한 삶을 부지할 것이다. 마지막에 카오스를 상징하는 초매의 황제 등극은 다시 한번 세상이 뒤집히는 반전으로 관객들의 몽매한 영혼을 강타한다.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연암을 해체하여 완전히 새로운 맛과 모양으로 요리한 작가도 탁월하지만, 사유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넘치는 손진책의 연출 경지는 감탄할 만하다. 우선 동일한 의상의 많은 인물들을 그룹별로 유형화시키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부여하여 동질적이면서도 미묘하게 존재하는 차이와 대비와 대립을 명료하게 가시화시켰다. 과장을 자제한 코믹한 말투와 제스추어들은 사상희극이 지니는 일정한 품위 안에서 관객들을 재미있는 생각게임 속으로 유도해 들어갔다.
이 작품은 「미추」 단원들만의, 오래도록 서로에게 익숙한 앙상블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호하고 아리송한 주제지만 작품에 대해 뚜렷한 자부심과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연출자가 의도한 연기양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집단적 마임은 거의 무용에 가까웠고, 무지하게 빠른 템포로 주고받는 대사 속에서도 절묘한 호흡을 보여주었다. 연암 역의 서이숙, 초매 역의 윤가현, 어사 역의 이미숙 등은 강력한 개성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도 작품의 총체적 지향점에 헌신하고 있었다.
이만큼 잔잔한 웃음의 파고 속에서 사유의 바다를 맘껏 항해한 작품이 있었던가! 문득 <열하일기>를 통독하고 싶은 엄청난 지적 호기심이 끓어오르면서 고전의 연극화에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이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월간 <객석>, 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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