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손병걸 시인의 시 '점핀' 본문
하나의 눈을 잃고 열 개의 눈을 얻은 후배 시인 손병걸의 시를 잃는다.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때때로 나를 그의 처지에 대입해 보곤 한다. 뜨거운 심장을 지녔던 청년시절까지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던 세상을 어느 날부턴가 문득 소리와 촉감, 그리고 마음으로밖에 읽어 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찾아들던 좌절과 슬픔,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라는 절망을 그는 과연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의 시를 읽으며 그가 겪었을 좌절과 슬픔, 절망을 떠올리게 될 때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주변을 더듬거리며 걸어본다. 반(反)시각패권주의자를 자청하며 오늘도 소리와 감촉과 냄새로 스스로의 시 세계를 축조하고 있는 후배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
점핀
새파란 하늘에 어둠이 번져갈 무렵
몹시 그리운 한 사랑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금 점핀을 잡는다
꺼진 별들 뒤에 감춘 통증을 켜야
별똥별 점자는 멀리 빛나는 것
이것이 시력 없는 내 생활의 활자이다
빈틈없이 어둠 물든 하늘도화지에
작은 별빛 점자 하나를 찍는다
와글와글 모여든 별빛 은하수가 흘러가면
비로소 먼 바다에 해가 솟듯
꺼진 별들을 켜는 내 문장은
명백한 실존이다 농도 짙은 기록이다
샹들리에 별빛 켜진 하늘길을 향해
어젯밤 내내 못다 걸은 발소리를
재빨리 마저 찍는다
어두워도 어둡지 않은 새벽달 뒷면
웅크리고 있던 사랑이 기지개를 켜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아침
어여쁜 얼굴 한 장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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