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작은 누나의 오곡밥 본문
주일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할 때쯤, 작은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심하지 않은 부산 말투.
“내일이 대보름인데, 오곡밥은 준비했나?”
“아니, 나물도 그렇고, 잡곡밥도 그렇고,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별로 좋아하질 않아.” 그건 사실이었다.
“야아, 그래도 절기에는 절기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라. 꼭 맛있어서만 먹는 거가. 알았다. 내 그럴 줄 알고, 언니네 와서 나물하고 오곡밥 마이 지어 놨다. 와 묵을래, 아니면 내가 갖다 줄까?”
“글쎄.”
“알았다. 그럼 쪼매만 기다려라. 내가 싸다 줄게.”
우리도 막 저녁을 먹기 위해 아침에 끓여놨던 된장찌개를 대피려고 할 때였기에 잘 되었다 싶어 누나를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작은누나는 찬합과 냄비에 각종 나물볶음과 찰진 오곡밥을 가득 담아 오셨다. 상을 펴고 뚜껑을 열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향긋한 나물향이 코를 찔렀다.
“큰 그릇에 밥하고 나물하고 너어가 고추장, 참기름 넣고 비벼먹어도 맛있다.”
누나의 말대로 나는 그렇게 비빔나물오곡밥(?)을 만들어 집에 있던 된장찌개와 더불어 한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니, 이가 안 좋다던데, 말린 가지나물이 좀 질기지 않나?”
“아냐, 안 질겨. 그리고 이 정도도 못 먹으면 내가 노인네지.” (나와 누나, 어머니 소리 없이 웃다.)
어머님께서도 오곡밥 한 공기를 말끔히 비우셨고, 아들 녀석만이 “나는 그냥 흰밥 먹을게요.”하며 딴 배를 탔다.
“누나도 좀 먹지.”
“아이다. 나는 언니 집에서 만들면서 이미 마이 먹었다.”
누나는 기어코 우리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후, 설거지까지 끝내주고서야 큰누나네로 건너갔다.
예로부터 우리네 어머님들은 자식의 입에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넣어주고 싶어하는 ‘밥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하는데, 누나는 엄마도 아닌데, 요즘 나만 보면 뭔가를 먹게 하려고 난리다. 물론 그건 나와 어머니 그리고 조카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본인의 형편도 넉넉지 않은데 매사를 저렇듯 챙기는 걸 보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오곡밥을 먹은 날이다. 힘들고 고단한 날의 청량한 약수(藥水)와 같은 그런... 누나도 행복하세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뢰즈/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의 개념(2) (0) | 2012.02.07 |
---|---|
정월 대보름의 소망 (0) | 2012.02.06 |
입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다. (0) | 2012.02.04 |
들뢰즈/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의 개념(1) (0) | 2012.02.03 |
55년만의 한파.. 몸도 맘도 꽁꽁 얼다 (0) | 2012.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