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들뢰즈/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의 개념(1) 본문
들뢰즈/가타리는 스피노자의 신체에 대한 정의를 계승하며, 더 정교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신체는 “자기보존과 생성의 욕망”을 갖고 있으며, “능동적인 변용의 능력을 통한 부분들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체는 미리 주어진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용의 역량에 따라서 외부의 신체를 합당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자기보존의 욕망을 증대-감소시키는 변용과정으로서의 욕망을 생성시킬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스피노자의 신체 개념을 더 발전시켜, 전체와 부분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듯이 신체와 기관이 미리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유기체주의적인 신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변용의 조성에 따라 신체들의 감각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유기체주의에 따르면 감각기관들이 미리 주어져 있어서 동일한 내용을 전달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노루를 바라본 사냥꾼의 눈’과 ‘노루를 바라본 관광객의 눈’은 변용의 측면 즉, 속도와 밀도와 강도란 면에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냥꾼은 자신의 신체를 사냥에 적합하도록 변용시키겠지만, 관광객은 자신의 신체를 보다 넓게 관망하기 적합하도록 변용시킬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신체가 감각기관과 필연적인 내적 연관 속에서 유기체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유기체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초현실주의 예술가인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빌려온다. 아르토는 ‘신체는 신체다. 신체는 혼자이다. 또한 기관organ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organism가 아니다.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라고 말한다.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은 ‘기관’을 단순히 없앤 신체가 아니라 ‘유기체적인 신체’로 한정되지 않는 보다 폭넓은 변용역량을 가진 신체이다. 즉, ‘입’은 ‘젖을 먹기 위한 입’이면서 동시에, ‘키스를 위한 입’, ‘말하기 위한 입’일 뿐만 아니라 장애인에게는 손을 대신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입’으로 다양하게 변용된다. 들뢰즈/가타리가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쓰는 이유는 “기관들에 대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기체적인 방식의 조직화에 대립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신체는 유기체가 규정하는 기관들의 부분들의 필연적인 결합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변용역량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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