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봄의 한 복판에서 '봄'을 생각하다... 본문
느낌 하나.
한 때 우리에게 봄은 때가 되면 찾아오는 단순한 계절이 아니었다.
봄은 부조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비유(比喩)이자 상징(象徵)이었고, 더 나아가 희망이었다.
우리는 겨울 속에서도 봄을 이야기했고, 봄 속에서도 '봄'을 기다렸다.
그 봄날, 눈 시린 햇살아래서 바라보던 앞 뒷산의 붉은 진달래.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생각하며 동료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올려다보던 고향집 하늘.
그 위로 풀풀풀 날아오르던 민들레 꽃씨들. 풀어진 신발 끈들을 고쳐 매며, 점점이 흘러가다가도 일제히 물결이 되던,
그 봄날의 사람들과 거리거리 위로 하늘하늘 흔들리던 아지랑이들.
느낌 둘..
그렇다. 그 봄, 내 20대의 그 봄날 속에는 젊은 동지들이 있었고, 젊은 꿈들이 있었고, 젊은 신념과 젊은 논쟁이 있었다.
젊은 조직과 젊은 애인과 젊은 패배와 젊은 결별과 젊은 아픔이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불꽃들과 돌멩이들, 그리고 자욱한 연기.....
그 속에서도 무심한 듯, 안타까운 듯 우리를 바라보던 노동에 지친 누이의 얼굴같은 노란 개나리.
전흔이 채 가시지 않은 공단의 골목과, 매캐한 최루탄 잔해가 나뭇가지 위에 더께로 앉은 교정의 여기저기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너무도 아름답게, 그리고 너무도 화사하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답답했다.
봄이 우리에게 던지는 친근한 유혹과 집요한 추파 속에서도 우리는 답답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것은.........
1920년대 시인인 이상화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시대의 격절감을 뛰어넘어
여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아마도 그 때 우리의 마음 속에도 '빼앗긴 봄'에 대한 동병상련의 정서가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느낌 셋...
그리고 지금. 2000년대, 다시 눈시린 봄 햇살을 나는 본다.
물론, 새롭게 마주하는 수현이, 솔찬이, 새봄이, 하나, 단비, 지아, 설아, 백준이....
동료들의 아이들, 그 얼굴에서 이전의 봄에서 만나왔던 화사함과는 또 다른 감동과 기쁨을 느끼지만,
그러나 나는 청승도 잃고, 투혼(鬪魂)도 식었다. 봄에 대한 상징과 암유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쓸쓸한 확인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의 어디쯤에선가 나는 우리의 처연한 현실과는 무관하게 너무도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다가오던 무악산의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도 꽃은 피었다
내 忍苦의 상흔으로 얼룩진 계절을 지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
반역의 꽃이 피었다
죽은 자들의 혼령이 떠도는 무덤가엔
그들의 얼굴 같은 꽃들이 피고
밤이면 찾아오는 승냥이 늑대들의
울음소리를 막아주는 꽃 ,꽃들
설혹 내가 죽어 이곳에 묻힌다 해도
내 가슴 속 뿌리깊은 거역의 마음들은
이처럼 무덤가를 떠돌다 꽃이 될 거다
그때 죽어 자유로워진 나의 혼백은
제 몸을 날려 이 땅 어디에건
뿌리를 내리는 꽃씨가 되어
탐욕의 빗장으로 굳게 닫혀진
너희들의 성곽을 날아 넘기 위해
밤으로 밤으로 달려 갈 거다
기나긴 기다림의 세월동안
그리움으로도 미처 다스리지 못한
내 가슴 속 분노가 꽃을 피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칠음과 감상의 과잉이 느껴지는 습작(習作)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때 치열하고도 날선 의식으로, 봄, 그 미처 획득하지 못한 상징과 암유의 가치들에 대한 확신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시대가 나를 아름답게 했고, 내가 그 시대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넷....
유행가 가사처럼 흘러가는 중년의 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들던 역마차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도 나에게 터럭만큼의 치열함이 남아있다면,
20대 시절의 그 봄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고.... 같이 울고 웃던 동료들과의 그 '맹세'를 환기하면서,
설혹 그들이 먼저 이곳을 떠났다손 치더라도 그 맹세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고,
다른 모습, 다른 이름으로 그 맹세를 지켜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나에게 봄은 여전히 암유이자 상징인 것이라고.
봄의 의미를 품고 사는 인생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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