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제주 4·3 항쟁 유해 발굴 현장을 보면서(music - '잠들지 않는 남도') 본문

현실

제주 4·3 항쟁 유해 발굴 현장을 보면서(music - '잠들지 않는 남도')

달빛사랑 2008. 12. 18. 16:56

 

 

아...그대들은 이제껏 잠들지 못한 채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다, 이제야 비로소 햇살아래

진실을 웅변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구나.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2008년의 겨울의 초입에서야

비로소, 비로소 우리 앞에 썩어진 육신, 앙상한 유해로 나타났구나.

시대의 아픔에 눈을 감아버리고,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채 살아온 우리의 나태를 질타하기 위해

그렇게, 그렇게 처연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구나.

부끄러워라.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완악하고,

다시 또 매카시의 후예들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진실한 교과서는 수정을 강요당하고, 뜻있는 선생님들은 학교로부터쫓겨나가고 있으며,

비판적 지식인들은 수구의 깃발 앞에서

면박당하기 일쑤인 현실이 벌어지고 있구나.

역사의 퇴행이 이렇게도 모질게 진행된 적이 이전에 있었을까...

어쩌란 말인가, 이 서글픈 반동의 세월을 어쩌란 말인가.....

 

첨부파일 09.잠들지않는남도.mp3

 

[4 3항쟁에 대하여]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희생자의 수를 정확히 알기 어려워 만5천~2만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심지어 '8만 명 희생설'까지 나오고 있다. 3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극우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진상 규명 노력]
제주 4 3학살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우익단체들의 주장과 문제의 언동]

월간조선과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우익단체들은 4 3항쟁을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1999년 4 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인사를 한 노무현 대통령을 반역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0년 10월 25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총회에서 김기배 의원은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왜 북괴 놈들이 서울을 내버려두고 제주도로 갔는지 알겠다. 거기가 인민군이 폭동 일으킨 곳 아닌가?”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월간조선은 2000년 2월호에서 4.3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한 일본 산케이 신문의 글을 인용했다가 4.3사건 유족회에게 소송을 당했고, 참여정부 시절의 1, 2심에서는 패소판결을 받았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후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