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참 좋은 봄날이었지 (4-24-목, 맑음) 본문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오랜만에 볕도 공기도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희한하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도 맑다. 아침 운동 끝내고, 빨래를 한 후 오랜만에 채소 가게에 들렀다. 오이는 천 원에 두 개로 여전히 비쌌지만, 다른 채소들은 지난주와 값이 같았다. 진도 대파는 한 단에 천 원이라 얼른 구매했다. 두부 3모와 달걀 한 판, 아삭 고추와 청양고추를 샀고, 순두부 2 봉지, 칼국수 면발 2개, 숙주나물과 깻잎을 샀다. 양배추도 사려고 했으나 크기가 너무 커서 나중에 사기로 했다. 큰 거 한 통이면 오래 먹을 수 있긴 하지만 보관하기가 어렵다. 유튜브에서 본 양배추 보관법을 따라 해 봤으나 다 먹기까지 기간이 길다 보니 색이 변하고 신선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소분(小分)해 놓은 걸 구매하거나 크기가 작은 걸 사곤 한다. 오늘 가게에서 본 거 핼러윈에 사용하는 호박만큼이나 커 보였다.
장 봐 온 채소와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있을 때, 작은누나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점심을 사줄 테니 함께 먹자는 전화였다. 뭔 일 있냐고 했더니 적금을 깼다고 했다. 만기가 된 적금을 타서가 아니라 중간에 적금을 깼기 때문에 밥을 산다는 말이 이상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누나는 “원래는 만기까지 가려고 했으나 ○○(딸)이가 돈이 필요하다네. 내가 현금이 있어야 도와주지. 그래서 적금 깼어”라고 했다. 최근 조카가 집을 구해 이사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집 구매 비용인지 이사 비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돈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래요. 알겠어요. 큰누나에게도 연락해 봐요” 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맘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동안 40이 넘은 조카딸의 철없는 행태를 많이 봐 왔던 터라서 이번에도 가난한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게 영 마뜩잖았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허구한 날 엄마에게 민폐라니, 내 자식이나 누나의 자식이나 철없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자 잠깐 우울해졌다. 다만 내 아들은 나에게 손을 벌리진 않는다. 하긴 벌려 봐야 나올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11시 30분쯤 누나들과 늘 가는 우거지 해장국집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었다. 큰누나는 이전보다는 많이 건강해진 얼굴빛이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운동도 자주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려고 노력해”라고 말하는 누나를 보며 짠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칭찬을 받으려고 어른이나 선생님께 하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은누나는 큰누나의 엄살 많은 행동과 매사(每事) 남에게 의지하려는 공주 같은 태도를 바꿔주어야 한다며 한동안 큰누나에게 모질게 대했다. 그때마다 나는 작은누나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런 일을 몇 차례 겪더니 큰누나는 이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불러대거나 속이 조금만 더부룩해도 응급실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로 인해 쉽게 거절 못 하는 막내가 한동안 고생했다) 하지만 70 넘은 양반이 오늘처럼 ‘나 달라졌어요’ 하며, 칭찬을 바라는 아이의 표정으로 나와 작은누나를 번갈아 보며 멋쩍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먹먹해졌다. 안쓰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무척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래도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잘했어요”하고 누나의 말이 끝날 때마다 칭찬 아닌 칭찬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큰누나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고, 나와 작은누나는 만수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바람도, 볕도, 공기도 다 좋은 봄날이었다. 꽃을 떨군 나무들은 더욱 푸르러지고, 미처 꽃을 내밀지 못한 나무들은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며 늦봄의 개화로 분주했다. 놀랍게도 나는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하나도 춥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거실의 화분들과 화초들을 테라스에 내놓았다. 화초들은 앞으로 오늘 같은 좋은 볕 말고도 예보 없이 내리는 봄비와 거센 소나기, 장맛비를 견뎌야 할 것이다. 내가 자신들을 방치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화초들은 나와 더불어 그 모든 어려움을 꿋꿋하게 견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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