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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가을비는 내리고, 신포동에서 제물포로 (金, 종일 비) 본문

일상

가을비는 내리고, 신포동에서 제물포로 (金, 종일 비)

달빛사랑 2024. 10. 18. 23:42

 

종일 비 내렸다. 비 내리는 날은 다른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깬다. 8시 30분쯤 출근해서 할 일을 처리한 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작가 류재형 형의 전시를 보기 위해 10시쯤 청사를 나와 신포동으로 향했다. 청사를 나올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 비는 신포동에 도착했을 때는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불지 않아, 작은 우산으로도 비를 막을 수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재형 형 혼자 앉아 있었다. 형은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서 와요, 아우님” 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의례적인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은 후, 방명록에 사인하고 형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감상했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내가 아는) 사진작가 중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필름 사진만 고집하는 김건환 형과 섬을 탐방하며 기록으로 남겨온 류재형 형은 기교와 근성을 모두 갖춘,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들이다. (희한하게도 그 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지만, 아무튼!)

 

기교주의 작가답게 이번 사진 모두 필름으로 찍었다고 하는데, 얼핏 봐도 전시된 사진을 찍기 위해 들인 공력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형은 그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닷가 바위 위에서 밤샘하거나 하룻밤 사이에 산을 두어 개 넘나들며 겪었다는 생생한 무용담을 쉴 새 없이 풀어놓았다.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작가로서 사진을 위해 쏟아부은 형의 노력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전시가 끝나면 예술가와 섬을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인데, 그때는 도록에 실릴 서문을 나에게 부탁할 예정이라고 했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을 딱 잘라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작품 감상을 마치고 재형 형과 식사하러 가려고 전시장을 나오려는데, 뜻밖의 인물이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스무 살 시절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Y였다. 현재 일산 킨텍스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친구다. 재작년 페북에서 만나 대충의 안부는 알고 있었으나 이렇듯 예상 밖의 장소에서 갑자기 만나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눈가와 목에 잔주름은 있었지만, 젊었을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순식간에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풋풋한 대학생 커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재형 형은 자꾸만 “이 미인은 누구시지?”, “어떻게 아는 사이지?” 하며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그냥 “오래전 동네 친구예요.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며 질문을 막았다. Y는 오래전 재형 형이 가톨릭 모임에서 사진 강좌를 진행할 때, 수강생의 한 명으로 강좌를 수강한 인연으로 전시장에 들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녀는 갤러리 설립 초기인 현재, 다양한 작가들에게 자신의 갤러리를 소개하러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오늘 전시장 방문은 일종의 영업 행위인 셈이다. 그건 갤러리 대표로서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다. 그녀는 오전 중에 갤러리를 오픈해야 하는데, 전시장까지 오는 길이 너무 막혀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며 서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수십년 만에 만나서 차 한 잔 나누지 못한 채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오후에 그녀로부터 '반가웠어. 잘 지내'라는 문자가 왔다.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일산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녀의 갤러리를 방문할 것 같지는 않다.

 

재형 형과 둘이 중식당 ‘도래순’에 들러 볶음짬뽕을 먹었다. 형의 제안으로 이과두주를 반주 삼아 마셨다. 비 오는 날 중국집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마시는 고량주는 일품이었다. 결국 한 병만 마시려다 두 병을 마셨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식사를 마치고 재형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도원역 지날 때쯤 수봉산 밑자락에 사는 후배 은준에게 전화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형,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주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술 한잔하려고 생각 중이었어요” 하며 반색했다. 집에 도착하자 은준은 환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 후, 곧바로 빗속을 걸어가 회를 떠 오고, 손수 두부를 부쳐 안주로 내놓았다. 비에 젖어 온통 눅눅했던 몸과 마음이 시나브로 뽀송뽀송해지고 말랑말랑해졌다. 갑자기 찾아가도 이렇듯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오랜만에 들른 그의 집은 가구 배치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65인치 대형 텔레비전이 거실에 놓였고, 옹색하고 작았던 식탁이 사라졌으며 널찍한 탁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집은 성격답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6시 30분쯤 은준의 집을 나왔다. 은준은 버스 정거장까지 따라 나와 함께 차를 기다려주었다. 내가 차에 올라 자리에 앉자 비로소 손을 흔들어준 후 집으로 돌아갔다. 7시쯤 집에 도착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쏟아졌다. 자다가 깨 시간을 보니 밤 10시,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문을 열어놓고 잠이 든 것이었다. 오랜만에 전기장판을 켰다. 그리고 자리에 누운 채로 하루를 복기했다. 참 정신없고 분주했던 하루였지만, 모든 날이 오늘 같다면 바빠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늦은 저녁을 차려 먹었다. 비는 가늘어져 있었지만, 바람이 찼다. 예보에 의하면 내일 영하로 떨어지는 지역이 있을 거라고 했다. 가을이 또 그만큼 깊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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