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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산 자는 분노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5-30-목, 맑음) 본문

일상

산 자는 분노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5-30-목, 맑음)

달빛사랑 2024. 5. 30. 15:40

 

후배 J가 새로운 시집을 냈다. 그런데  시집에 실린 한 편의 시가 걷잡을 수 없는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긍정적인 파란이면 좋았겠지만, 누군가가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파란이라서 주변의 문우들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J는 앞서 말한 그 '한 편의 시'를 통해 사후 미투(Me Too)를 한 것이다.

 

그 대상은 문단, 특히 인천 문단의 문우들이라면 몇 구절만 읽어봐도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는 유명 시인이다. 18년 전, 그가 뇌경색으로 우리 곁을 떠났을 때, 동료들은 그를 기리며 부평의 한 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웠으며, 몇 년 후에는 그의 문학상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열사로 추대되어 매년 열사추모제 때면 기억 속에서 불현듯 호명된다. 나 역시 생전의 그와 얽힌 추억이 많은 사이였고, 화가인 그의 아내 S 선배와도 현재 무척 친한 사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한편, 시집을 낸 후배 J는 나와 30년 전부터 친하게 지내온 노동운동의 동지이자 문학적 동료다. 그녀는 늘 나에게 “나는 문학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아요. 노동해방을 위한 도구로서 나는 시를 쓰는 것뿐이에요. 나의 시가 해방을 앞당기는 무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로 성격이 올곧고 원칙적이며 타협을 모른다. 그래서 상처도 많이 당하고 아픔도 많아 정신병에 입원했던 이력도 있다. 나는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안다고 자부한다. 이런 성격의 그녀가 누군가를 음해할 목적으로 없는 사실을 꾸며냈을 리는 만무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발생한다. 사후(死後) 미투는, 죽은 자는 말이 없어 소명할 수 없고, 고발한 자는 홀로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J의 진술을 수용하게 되면 미투 대상이 되는 해당 시인의 명예는 물론, 그의 가족과 그를 추모하기 위해 조직된 추모사업회의 모든 이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문학상을 받은 애꿎은(내막을 모르는) 시인들, 그리고 그를 믿었던 지인과 수많은 독자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진행된 사업, 이를테면 문학상이나 시비 건립, 문학관 개관 등이 당장 중지되거나 철폐될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사후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J의 진술과 고발에 대해 “그럴 리가?”라든가, “정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아는 시인은 생전에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등과 같은 발언을 하며 J에게 확인을 요구하게 되면, 그건 (이미 상처 입었다고 추정되는) 그녀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것이다. 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상황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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