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3-17-일, 맑음) 본문
오랜만에 누나들과 함께 점심 먹었다. 그녀들은 오늘따라 유독 과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 이를테면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와 이모, 이모부 이야기, 전남편(난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기 전 다른 사내와 결혼해서 딸인 민예 누나를 낳았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소생인 민예 누나가 다른 집의 양녀로 가야 했던 안타까운 이야기, 아버지가 부자라는 말에 속아서 시집온 후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던 엄마의 이야기, 다른 집의 양녀가 된 민예 누나가 사과 두 알을 품에 안고, 엄마와 동생에게 주려고 손을 호호 불며 눈 덮인 두 개의 산을 넘어 엄마를 찾아왔던 이야기, 그러나 엄마는 따듯한 말 한마디 해주기보다는 심한 욕설을 하며 “이년아, 맛있는 거 있으면 너부터 챙겨 먹어야지 누굴 줘. 다시는 오지 마!”하며 울며 돌려보냈다는 이야기, 해미에 살던 이모부가 가끔 꼬막을 한 부대 가져다줘서 그걸 식구들과 함께 까먹었던 이야기, 엄마와 외갓집에 갔다가 죽은 형의 이야기, 그 일로 인해 할머니로부터 상상하기 어려운 구박을 받았으나 죄인처럼 묵묵히 그 구박을 받아내던 엄마의 이야기, 어린아이답지 않게 착했던 형의 이야기, 작은엄마가 시시콜콜 할머니께 엄마의 행적을 고자질해서 엄마를 곤란하게 했던 이야기, 엄마가 호롱불 밑에서 가족들의 옷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하던 이야기, 큰누나에게는 치마저고리를 예쁘게 만들어 주고 작은누나에게는 사내아이처럼 바지만 만들어 입혀, 어느 날, 작은누나가 “엄마는 왜 언니에게는 이쁜 옷 만들어 주고 나에게는 창피하게 남자들처럼 바지만 입히는 거야?” 하며 울며 투정한 이야기, 나를 업고 학교에 갔다가 내가 우는 바람에 당황했던 작은누나 이야기, 부자였던 큰고모 자제들이 말년에 하나같이 비참하게 몰락해 간 이야기 등등, 그 어떤 소설보다 감동적이고도 애잔한 이야기들이 누나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누나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오자, 재가하며 친딸을 남에게 수양딸로 줘야 했던 엄마의 심정에 감정이 이입되어 가슴이 먹먹했다. 또한 어린 민예 누나가 엄마와 의붓동생들이 그리워 발이 푹푹 빠지며 눈 덮인 산을 넘어온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시어머니가 볼세라 찾아온 딸을 구박해서 돌려보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이나, 험한 산길을 넘어왔지만, 친엄마로부터 따듯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어린 소녀의 심정이나 얼마나 애달팠을까. 그래서 더욱 엄마 살아 계실 때, 엄마의 삶을 아카이브 하지 못한 게 너무도 아쉽다. 남들 이야기는 구술과 녹취를 통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을 지속해서 해왔으면서도 정작 가장 풍부한 이야기의 보고(寶庫)이자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인 엄마의 삶을 기록하지 못한 게 너무나도 아쉽다. 나의 기억은 무뎌져 가고 나의 삶의 흔적 또한 세월 속에서 잊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듣고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에 신경 쓰고 싶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엄마,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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