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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하고 싶지 않은 일 (3-12-화, 오전에 비, 종일 흐림) 본문

일상

하고 싶지 않은 일 (3-12-화, 오전에 비, 종일 흐림)

달빛사랑 2024. 3. 12. 23:04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요즘에는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런 생각은 강해집니다. 명증한 의식과 건강한 체력으로 '놀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누군가는 그런 나에게 "배가 불렀군"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더러 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보니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삶의 질입니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면서까지 돈을 벌면 뭘 하나요? 혹자는 또 말합니다. 삶의 질을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돈이 있다고 삶의 질이 좋아지는 건 결코 아니더라고요. 돈이 엄청나게 많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생각이 바뀔 만큼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다 보니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출판사 대표 Y가 의뢰한 한 70대 남성의 '수필집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Y는 분명 나의 어려운 처지를 배려해서 부탁했을 겁니다. 적어도 5백만 원은 벌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남의 인생을 대신 글로 써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것도 일종의 매문(賣文)이잖아요. 물론 그가 구술한 내용을 정리하거나 그가 쓴 글을 부드럽게 다듬는 것이니, 전적으로 내가 창작한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래요. 시인으로서 내 자신의 글도 제대로 못 쓰면서 남의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을 한다는 게 참 부질없어 보였던 겁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의 조급함은 더해 갑니다. 해놓은 건 없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경제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맡아해 주어야 Y의 출판사에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증 문제로 내가 무척 어려웠을 때 Y가 일거리를 많이 맡겨 준 덕분에 힘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거든요. 하여, 나도 그녀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겁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정작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일단 마지막 선택의 기회는 남아 있어요. 내일이나 모레, Y와 함께 의뢰인 남성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때 도움이고 뭐고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입니다. 후배 Y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게 나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거든요. 내가 진정성 있게 거절한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Y도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리 단정짓고 의뢰인을 만나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모르지요. 직접 만난 그 사내로부터 전혀 뜻밖의 인간적 매력을 발견하게 될지도...... 어떤 경우든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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