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굴 속의 여우처럼 (1-13-토, 맑았다가 흐렸다가) 본문

굴속의 여우처럼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여우는 아마도 먹이를 구하기 위해 굴 밖으로 나갔을 테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늦게 일어난 건 아니다. 일찍 일어나 빨래하고 청소하고 술 마신 다음 날의 한결같은 루틴처럼 라면을 삶아서 아침을 먹었다. 탄수화물 섭취에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라면에 양파, 버섯, 숙주, 콩나물 등 갖은 채소를 함께 넣고 끓였다. 탄수화물 섭취에 대한 보상심리였을 것이다. 맛은 괜찮았다. 미역도 넣을까 하다가 약간 미역 비린내가 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점심에도 사리곰탕면을 끓여 먹었고 저녁에는 오이를 듬뿍 넣은 콩나물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밤 10시쯤 되어서는 엊그제 사다 놓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행히 나의 ‘여우 굴’에는 생각보다 먹을 게 많이 비축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굴속에서는 대체로 먹거나 잤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많이 잤다. 연속적으로 길게 잔 게 아니라 수면 질이 그리 좋지 않은 짧은 잠을 반복해서 잤다. 잠을 깰 때는 대체로 먹었다. 저녁이 되었을 때는 심지어 '동물들도 이렇게 생활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허비한 거야 아니면 실컷 먹고 잤으니 알뜰하게 쓴 거야? 판단하기 어렵다.▮밤중에는 소설 「듄」과 관련한 정보를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유튜브 동영상과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동영상을 시청했다. 사자와 하이에나의 싸움은 몇 번을 봐도 늘 재미있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과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관련한 글을 읽었다. 낮에 충분히 잤기 때문에 글이 눈과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리운 그 시절'의 느낌이다. 짐승처럼 살아야 몸이 가볍다는 걸 알겠다. 뭐, 사람마다 하루를 소일하는 방식이 다 다른 법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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