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나의 상상력에게ㅣ(01-28-토, 맑음) 본문
언제부터인가 상상력이 나를 떠나고 있다. 떠나버린 상상력의 빈자리를 싸구려 감상이 빼곡하게 메꾼다. 가끔 3류 감상은 상상력의 옷을 입고 상상력의 표정을 짓기도 하며 내 게으른 의식을 안심시켰다. 그래서 나는 싸구려 감상을 낭만이라고 생각하거나 잿빛 상상력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한낮의 벤치이건 늦은 밤 등불 앞이건 뭔가를 쓸 수 있을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 누적된 피로도 마음의 상처도 글을 쓰면 쉽게 풀리고 회복되었다. 쓴다는 일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다. 글을 쓸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나와 손끝을 거쳐 화면이나 백지 위에서 다양한 쇼를 펼치던 상상력은 나의 오랜 벗이자 가난한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상상력은 두툼한 지갑보다 매 순간 나를 안심시켰고 나를 빛나게 해 주었다. 나 홀로 있을 때도 나를 빛나게 했지만 사람들 속에 있을 때 특히 나를 더욱 빛나게 했다. 상상력이 나를 옹위해 줄 때, 초라한 옷차림과 낡은 구두, 헝클어진 머리칼과 가벼운 지갑에도 나는 즐거웠다. 그때의 빈한(貧寒)은 염결(廉潔)한 문사의 당연한 덕목이라 여겼고 오히려 뿌듯했다. 그 모든 건 상상력이 나서서 코디한 결과라고 나는 믿었다. 그런데 그토록 오래 나와 더불어 즐거웠고 나를 빛나게 했던 상상력이 나를 떠나다니, 믿을 수가 없다.■그간의 정리(情理) 때문일까, 내 머리, 내 심장, 내 손끝으로부터 일거에 몸을 빼진 않은 거 같지만, 나를 보는 상상력의 눈빛에서 나는 믿음이 아니라 연민을 읽는다. 오래전 상상력의 눈빛에서 서운함과 질책을 읽었을 때, 나태를 떨쳐버리고 다독, 다서, 다상량의 시간으로 돌아왔어야 했는데, 나는 자만했다. 나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었으면서 상상력에게는 그의 양식인 다독, 다서, 다상량을 제공하지 않았다. 게을렀다. 후회하는 마음으로 겨울밤 등불 앞에 앉아 오래전부터 맺어온 상상력과의 정리를 생각하니, 계절은 다르지만 문득 최치원의 한시 ‘추야우중’의 한 구절, ‘등전만리심’이 떠오른다. 허허로운 마음이 만 리 밖까지 가출한다 한들 토라진 상상력만 다독여 데려올 수 있다면 그게 뭔 대수겠는가.■상상력이 신선한 빛을 잃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 역시 늙기 시작했을 거다. 조금씩 조금씩 내 삶은 잿빛으로 변해갔을 것이고……. 남은 상상력만이라도 보듬고 챙겨서 최후의 빛을 환하게 뿜어내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밤이다. 그나저나 집 나간 마음은 지금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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