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오와 윤을 만나다 (12-18-일, 맑음) 본문
급하게 처리할 일도 없고 약속도 없는 고즈넉한 휴일의 오후였다. 백신 접종 3일째, 특별한 부작용도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최근 핫한 드라마인 '재벌집 막내아들' 재방송을 보거나 YouTube를 보았다. 그러다 방을 청소하고, 자주 쓰는 만년필의 잉크를 갈아끼웠다. 말라버린 만년필은 따듯한 물에 담가 묵은 잉크 찌꺼기를 제거해 주었다. 부드럽게 종이 위를 구르는 만년필의 필기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3시 30분쯤 한숨 잘까 생각해 음악을 틀어놓고 자리에 누웠다. 그때 다인아트 미경이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어디세요. 지금 혁재 씨와 사무실에 있는데, 술 한잔하시러 나오실래요." 하며 어디가 좋겠느냐며 장소를 물었다. "음, 나야 뭐 구월동이 좋긴 하지." 대답하자 "그럼 일단 5시쯤 구월동으로 나오세요. 그럼 장소를 잡고 연락드릴게요." 했다. "내가 꼭 합류해야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이렇게 물으면 "아, 피곤하시면 쉬세요."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럼요.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졸리기도 하고 백신도 맞아 내키지는 않았지만, 혁재도 있고 미경이도 강권해서 어쩔 수 없이 대충 세수만 하고 구월동을 향했다. 4시 50분, 롯데백화점 앞을 지날 때쯤 혁재로부터 "형, '첫술'로 오세요." 하는 전화를 받았다. "그래, 갈매기도 문을 안 열고 경희네도 늦게 열기 때문에 그리로 갈 것 같더라." 대답한 후 정확히 5시에 '첫술' 도착했다.
오늘 미경이는 머리도 아프고 호흡도 가빠지는 등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지자 혁재에게 연락했던 모양이었다. 근처 동화마을에 있던 혁재는 다인아트에 들러 사혈침으로 미경이의 손을 따주었고, 미경이는 다행히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첫술에 들렀을 때, 혁재는 돼지갈비를 굽고 있었고, 미경이는 콩나물국을 연신 마셔대고 있었다. 나올 때 툴툴거리던 마음도 그들의 얼굴을 보자 이내 풀어졌다. 나와 미경이는 소주를, 혁재는 막걸리를 마셨다. 해물을 먹고 싶다는 미경이의 요청으로 자연산 석굴을 주문했는데, 주인은 굴을 내오며 "자연산은 너무 비싸 두 개만 주었습니다. 나머지는 양식 석굴이에요"라고 말했다. 자연산은 얼마나 비싸냐고 물었더니 석굴 하나가 해장국 한 그릇값이라고 했다. 오 마이 갓! 혁재는 '원래 그래요' 하는 표정으로 담담했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굴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실했지만, 맛은 그냥 굴이었다. 나는 차라리 먹기 적당한 크기의 양식 굴이 훨씬 좋았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후배 상훈이가 문득 생각났다. 아픈 손가락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첫술'에서 나와 2차로 '경희네'에 들렀다. 혁재는 잠깐 갈매기에 들렀다 왔는데, 그곳에서 조구 형이 세만 형이랑 술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갖고 왔다. 갈매기가 문을 연 건 아니어서 그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막 안주를 시켜놓은 상태이기도 하고 오래 마실 일이 아니어서 그냥 경희네에 있기로 한 것이다. 경희네에서는 두부새우젓탕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일어났다. 미경이를 보내주고 버스를 타기 위해 혁재와 갈매기 쪽으로 걸어오다 보니, 막 술자리를 끝내고 택시에 오르는 조구 형과 세만 형이 보였다. 택시 기사의 눈치가 보여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형들을 보내드리고 혁재와 나는 순복음교회까지 걸어와 버스를 탔다. 혁재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익숙한 훈기가 순식간에 몸을 녹여주었다. 막 보일러가 가동되었는지 바닥이 따끈따끈했다.
세수를 마치고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는다. 가습기 때문인지 바깥과의 온도 차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중 유리창 중 안쪽 유리창에 물기가 맺힌다. 바깥 유리창에 성에가 끼지 않는 게 참 이상하다. 어둠은 좀 더 조밀해졌을 것이다. 예정에 없던 일요일 오후의 외유였다. 밤이 되면서 바람이 분다.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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