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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인생 40년 후배의 낭독극 (12-11-일, 맑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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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인생 40년 후배의 낭독극 (12-11-일, 맑음)

달빛사랑 2022. 12. 11. 21:50

 

40년은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약관에서 이순의 나이까지 무소의 뿔처럼 직진해 온 후배의 연극 인생 40년을 보면서 문득 경외감이 들었다. 낭독극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이미 극장에서 관람한 것이 대부분이라서 작품에 관한 기대로 낭독회에 참석한 것은 아니다. 뭐랄까, 이런 종류의 공연 관람은 품앗이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 말고도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후배의 40년 예술 인생에 관한 존경과 신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결핵으로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이후 복학은 했지만, 졸업하지 않은 채 연극계의 막내가 되어 시작한 연극인의 삶은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삶이었다. 가난과 배고픔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무대에 오르는 일도 요원해 보일 때, 그를 끝까지 연극판에 붙잡아 둔 것은 환금(還金)에 대한 기대도 유명 배우로서의 명성도 아니었고 오로지 예술 자체에 대한 그의 애정이었다. 그냥 연극이 좋고, 연기가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가 돈과 명성을 좇았다면 그와 나의 관계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그는 극단을 운영하며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물론이고 일본에 진출해 그곳 연극계와도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엄청난 다변가인데, 아마도 그의 다변은 이처럼 다채로운 삶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 나는 늘 생각한다. 앞으로도 후배가 행복한 고뇌, 처연한 아름다움의 길인 예술가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나 역시 같은 예술가로서 그의 앞날을 응원할 것이다. 

 

1시 40분쯤 공연장에 도착해 입구에서 방명록에 서명하고 작품집 두 권을 5만 원에 구매했다. 안내하던 앳된 학생이 만 원을 거슬러줬다. 거스름돈은 괜찮다고 하니 "고맙습니다" 하며 머리를 꾸벅했다. 웃는 표정이 참 예뻤다. 시간이 남아서 그런지 관객은 나 말고 두어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 연극계 지인들로 보였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객석에는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관객들이 들어찼다. 공연은 정확하게 2시에 시작되어 세시 10분쯤 끝이 났다. 작가와의 대화'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재상이에게 모든 일정 마치고 술 한잔하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오며 혁재에게 전화했더니 동화마을에서 장사 중이라고 했다. 어제와 그제 130만 원을 벌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인들이 개업(?)을 축하하며 팔아준 매상이었을 것이다. 혁재는 당분간 그곳에 머물며 은수의 장사를 도울 것이다. 그렇다면 구월동에 나오는 일이 별로 없겠지. 상대적으로 혁재를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그렇다면 이차에 나도 술을 줄여야겠다. 혁재는 나에게 동화마을에 들르라고 했으나 거절했다. 일요일 오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쉬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술 마실 게 뻔하니까. 

 

 

재상이의 낭독극에 참석하기 전, 잠깐 선광갤러리에 들러 이복행 작가의 전시회를 구경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이 다른 작가 작품들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미 끝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 작가의 작품들은 갤러리 안 쪽의 다른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만난 작품들은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두 작가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전시를 하고 있었던 것. 입구 쪽에 방명록도 두 개였다. 그중 이 작가의 방명록을 찾아 '화혼무한, 문계봉' 서명을 하고, 작품을 둘러봤다.  내가 좋아하는 계열의 파랑과 보라색 작품들이 많아서 반갑고 친숙했다. 구상화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에 관해서는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작품을 보는 순간 '이복행이 이복행다운 작품을 전시했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에서 그것을 창작한 작가가 보인다는 건,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예술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고집스럽고 치열한 삶, 점잖은 모습 속에 감춰진 야성, 밉잖은 선민의식..... 다가가기 쉬운 작가는 아니지만 알고 나면 미더운 작가, 이복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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