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깊어가는 가을 (10-12-水, 맑음) 본문
어제는 퇴근길에 갈매기에 들렀습니다. 비서실장으로부터 낙지 다섯 마리를 얻었거든요. 집에 가져가기도 뭐하고 막걸리도 생각나고 해서 갈매기에 들렀던 거지요. 두 마리는 갈매기 형수님에게 주고 나머지 세 마리는 데쳐서 안주로 먹었습니다. 막걸리 한 병을 비웠을 때쯤 종우 형의 연락을 받고 혁재도 갈매기에 들렀습니다. 혁재는 좀 수척해 보였습니다. 예상대로 어젯밤 밤새 술을 마신 모양이었습니다.
때마침 후배 상훈이와 S가 전화를 걸어와, 막걸리 4병째를 비우고 있던 혁재와 나는 갈매기를 나와서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어디를 갈까 하다가 혁재의 제안으로 민예총 건물 1층에 있는 ‘꽃술’에 들러 웅피 조개와 섭을 먹었습니다. 웅피 조개는 6개에 4만 원이었고 섭은 5개에 2만 5천 원이었습니다. 와! 조개들이 그렇게 비쌀 줄은 몰랐습니다. 상훈이는 “형, 여기는 S가 계산할 거예요. 맘 편하게 먹어요”라고 했지만, 요즘 사업이 시원찮은 S가 마음에 걸려 웅피 조개 값은 내가 내겠다고 말하고 5만 원을 우선 계산해주었습니다. S는 “고맙습니다” 하며 환하게 웃었지요. “형, 그러지 마세요. 제가 계산할 거예요” 하지 않은 걸 보면 내심 술값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눈치 없는 상훈이가 비싼 안주만 골라 시켜서 마음을 무척 졸였을 겁니다. 옆에서 혁재는 “오, 형! 멋있어요” 하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담배 피우러 나갔을 때 상훈에게 “S가 요즘 수입이 있어? 너무 부담을 주는 거 아니야?”라고 물었더니, “그럼요. 괜찮아요.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내가 계속 술값을 냈기 때문에 오늘은 그 친구가 낼 거예요.”라고 했다. 의구심이 들었지만, S가 수입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곳을 나오자 혁재는 “형들, 이번에는 제가 한잔 살 테니 ‘비틀즈’에 가서 음악 듣다 가실래요?”라고 제안했고 모두가 동의해 비틀스에 올라가 음악을 들었습니다. 며칠 전 들렀을 때처럼 어제도 비틀스는 썰렁하더군요. 사장님은 알아서 혁재의 노래들을 틀어주었습니다. 좋은 스피커로 들으니 노래가 훨씬 좋게 느껴졌습니다. 장사를 마치고 그곳에 들른 ‘경희네’ 사장인 경희 누나도 만났습니다.
어제는 희한하게 많은 사람을 만난 날입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그동안 자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우연하게 볼 수 있는 날 말이에요. 아무튼 반갑고 유쾌한 날이었습니다. 다만 갈매기에서는 막걸리, 꽃술에서는 소주, 비틀스에서는 맥주, 이렇게 세 종류의 술을 섞어 마셔서 그런가 취기가 다른 날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귀가했습니다. 역시 카카오 택시를 불러 타고 왔습니다. 요즘 카카오 택시 탈 일이 많이 생기는군요. 돌아와서는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픽 쓰러져 잠이 들었던 같습니다. 일어나 보니 새벽이더군요. 다행히 속도 쓰리지 않고 머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절주를 해야겠어요.
요즘 지나치게 자주 과음을 했습니다. 물론 내가 조직한 술자리가 아니라 연락 받고 나간 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매번 너무 맹렬하게 술을 마셔댄 것 같더군요. 깊어가는 가을, 이 아름다운 계절을 술독에 빠져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러기에는 계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늦은 밤, H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개동에서 회식 중에 전화를 한 것이었는데, 약간 취한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15분 정도 통화하며, 내일 출근하려면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 말고 일찍 들어가라고 말해주었는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이미 늦은 시간이어서 멋쩍더군요. 그 친구도 조직 수장으로서 무척 피곤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습니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53년도 영화 ‘동경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관한 리뷰는 반드시 써볼 생각입니다. 영화 평론가들이 영화 역사상 위대한 영화를 꼽을 때 이 영화를 하나 같이 언급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하라 세츠코라는 매력적인 여배우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공들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영화는 남아 그 감동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걸 보면서 예술의 힘과 생명력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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