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시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본문
시를 너무 잊고 살았다. 요 몇 달은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봄이 시작되면서 선거가 있었고, 익숙한 좌절이 있었다. 갑자기 뻥 뚫린 마음의 구멍 속으로 증오와 모멸과 체념이 스며들었다. 많은 술을 마셨고, 많은 말을 했다. 많은 말과 술자리들은 쉽게 합리화되기 일쑤였다. 뉴스는 물론 싸움과 패배를 다룬 그 어떤 영상도 보지 않았다. 무관심과 태만을 저항이라고 유치하게 합리화했다. 머리맡에서 내 손을 기다리는 그 어떤 책도 들춰보지 않았다. 갈수록 마음은 황량해졌다. 아니다. 나는 이렇게 명시적으로 말하면 안 된다. 마음조차 내 것이 아니었으니, 생각조차 뭔가에 들린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하여 '황량해졌다'는 '황량해졌을 것이다'라고 다시 쓴다. 내 생각조차 그리고 나와 유형 무형으로 얽힌 사람들의 선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날선 욕망들이 부딪치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변화와 모종의 상황들이 시로부터 멀어진 나를 변호해 줄 수는 없다. 그걸 바라는 건 치사한 일이다. 그 변화와 상황 중에는 나를 시 앞으로 끌어당기려는 것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시인에게 반응을 요구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방기했다. 의미 없는 일로 너무 많은 시간을 죽였다. 소중한 감정을 허무하게 소모했다. 고사 직전의 시심(詩心)이 지르는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로 태어났어야 할 많은 인상적인 순간을 외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 비로소 나는 시의 부름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었다. 마치 예정되어 있던 어떤 의식처럼 머리맡 시집을 집어들었고,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 일순간 형해화되었던 언어와 감정들에 뼈와 살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벅찼다. 일어나 앉은 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에게 미안했다. 너무 늦어 미안하다고 시에게 용서를 빌었다. 비로소 나의 정체성을 아프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매 순간 시 앞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좀 더 앞으로, 시 앞으로 무릎을 당겨 앉으며 언제 어느 곳에서나 시와 함께 있겠다고 다짐했다. 무심한 나를 그래도 잊지 않고 집요하게 찾아준 시에게 너무 고마웠다. 오랜만에 만난 이 익숙한 설렘, 떨림, 벅차다. 그렇다. 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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