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뜻밖의 만남, 최초 주선자는 오지 않고 본문
이번 명절에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몇 편의 시를 완성하려고 생각 중이었다.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 넣고, 방치됐던 노트 중에서 만년필과 어울리는 지질의 노트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전에는 옷방 청소를 하며 다시 또 입지 않는 옷을 버리려고 했으나 (원래 옷도 없었을뿐더러 얼마 전에 한 번 버리고 난 터라서) 버릴 옷이 딱히 눈에 띄질 않았다. 현관 신발장을 열고 신지 않는 10여 켤레의 신발을 꺼내 비닐봉지에 넣어 문밖에 내놓았다. 버리기 아까운 신발들도 여러 켤레였으나 미련 없이 버렸다. 근 2년여 동안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이라면 이후에도 신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사실 그리 비싼 것들이 아니어서 10여 켤레 신발값 모두 합해도 30만 원이 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버리면서 배우는 게 있다. 당장,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으면 구매하지 말 것, 가능하면 옷이나 신발은 오프라인에서 현물을 보고 구매할 것 등등 나름의 원칙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멀쩡한 물건을 버리게 된 것은 분명 구매한 물건이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테니.....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후배 장(張)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정도 가까웠으니 한잔하자는 것이었는데, 요즘 술을 삼가고 있는 터라 썩 내키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서 이미 취기가 느껴졌다. “너 술 마셨어? 취한 것 같은데?” 했더니 자신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며 극구 부인하기에 그러려니 했다. 2주 전쯤 용현동 정육식당에서 소고기를 얻어먹은 터라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만나기로 하고, 다만 본 지 오래된 혁재에게도 연락해서 함께 보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장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 시간 혁재는 신기시장에서 애인과 설 장을 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형, 잘 지내고 있으신 거죠? 많이 건강해지셨어요?”하고 물어왔다. 최근 갈매기도 안 가고 술을 삼가는 중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던 모양이다. “그냥 그렇지 뭐.”하고 용건을 말했더니 “그럼 신기시장 ‘이쁜네’로 오세요.” 했다. 3시, 오랜만에 혁재와 그의 애인 로미 씨를 만났다.
혁재는 최근 칩거하면서 어머니와 술자리를 자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녹음해 둔 모자의 대화 내용 하나를 내게 들려주었다. 맨날 밖으로만 나돌던 아들이 자신과 긴 시간 함께 해주는 게 고마웠는지, 어머니는 트로트에서부터 개화기 창가, 불교 법문 등을 부르고 낭송하며 흥겨워했다. 그 녹음 내용을 들으면서 나 또한 엄마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늦은 밤 술 마시고 들어와 엄마와 나눈 대화를 녹음해 둔 파일이 내게도 여러 개 있다. 그 녹취를 재생해 보면 엄마의 들뜬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종일 빈집에 쓸쓸하게 있다가 술 취한 아들이지만 살갑게 말을 걸어오니 그게 내심 기뻤던 모양이다. 혁재의 어머니가 부르는 구성지고도 한이 밴 노랫소리를 듣다보니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는데”라고 했더니, 혁재는 “엄마 생각나시죠?” 하며 재생을 중지했다. 혁재에게 “최근 어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내가 다 고맙다.”라고 했더니, 혁재도 웃으며 인정했다.
장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혁재는 “걔, 분명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술 먹고 자고 있을 거예요. 형에게 만나자고 한 것도 아마 술기운으로 한 걸 걸요”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셋이서 기분 좋게 낮술을 마셨다. 혁재는 막걸리 두 병을 마셨고 나는 소주 두 병을 마셨다. 딱 적당했다. 동화마을 은수에게 전화를 받은 혁재와 로미는 그곳에 가서 한 잔 더하겠다며 안주를 사기 위해 시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고, 나는 시장 앞에서 36번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함께 가자고 강권했지만, 나는 정량을 넘어선 음주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양했다. 집에 도착하니 7시, 잘 도착했느냐며 로미 씨가 전화했고, 곧이어 동화마을 음주 멤버들이 돌아가며 안부를 물어왔다.
후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술 마시다 말고 쓱 나갔다가 와 척하고 내미는……. '뭐지, 내가, 내 입술이 안쓰러워보였나' 순간 감동했다. 이 고전적 방식의 배려는 그동안 잊고 있던 내 오랜 추억들을 문득 소환해 주기도 했는데...... “모두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어떻게 살든 항상 건강하고 웃을 일만 많길 바라. 올 한해도 복 많이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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