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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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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눈을 기다리며

달빛사랑 2021. 1. 5. 09:27

 

 

소용없는 말들이 세상의 모든 틈을 막아 숨이 가쁘다. 큰 눈이 온다면 하늘도 세상도 조금은 헐거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기다리는 눈은 좀처럼 오질 않았다. 생각보다 완고한 겨울. 가끔 내가 잠든 사이에 가루눈 몇 차례 풀풀 측은하게 날렸다지만, 지상에 닿자마자 사라져버려 잠에서 깨었을 때는 세상은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눈을 기다리기 시작한 이후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도 세상은 여전히 촘촘할 뿐 전혀 헐거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보에 의하면 이틀이나 사흘쯤 뒤에 충청 호남에는 큰 눈이 내린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시늉만이 아닌 눈발의 낭자한 군무를 볼 수 있을까.

 

대학 시절, 백마역 근처에 있던 ‘(착한 농부의) 썩은 사과(이 때는 '초록언덕')’에서 후배와 함께 술 마시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굵은 눈발이 세상에 가득했다. 그 함박눈에 마음이 환해져서 눈길을 걷고 바라보고 뒹굴며 깔깔대다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오가는 신촌행 막차를 놓쳐버렸다. 일부러 놓친 건 아니었지만 놓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와 철로 주변의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함박눈이 철로와 골목들을 서서히 지워갈 때쯤, 역 근처 여인숙을 찾아 헤맨 끝에 요행히 빈방이 하나 있어 들 수 있었다. 그날 밤 내린 눈은 마치 세상에 내리는 마지막 눈처럼 소담한 함박눈으로 밤새도록 하염없었다. 후배와 나는 이해의 농도나 깊이와는 무관하게 시베리아 설원의 레닌을 비롯하여 백석이나 윤동주나 김광균이나 프랜시스 잼 등등 알고 있는 시인들과 그들의 시를 입에 올리며 달뜬 기분으로 밤새 수다를 떨었다. 장하게 내린 눈이 아니었다면 그런 류의 수다는 없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하늘은 눈 시리게 맑아 있었고, 빨아 방바닥에 널어놨던 양말은 뽀송하게 말라 있어 기분 좋았던......

 

 

내일 저녁이나 모레쯤 이곳에도 눈이 닿을 거라는 소식이다.


엄마는 오늘도 호박죽 두 팩으로 하루를 보냈다. 컨디션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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