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나에게만 걱정인 혁재 본문

코로나바이러스가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대면회의를 하지 말라는 인천시 지침 때문에 문화재단 정례 이사회가 열리지 못했다. 이사회 담당 재단 직원들은 이사들을 한 명씩 직접 만나 주요 안건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동의 여부를 묻는 서명을 받았다. 나도 민예총 사무실에서 오후 세 시에 직원을 만나 자료를 검토했다. 안건이 많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는 길에 갈매기에 들렀다. 은수와 혁재가 화장실 문짝을 교체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하고 물어오는 혁재에게서 술 냄새가 풍겼다. 눈도 살짝 풀려 있었다.
봄날, 공원이나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혁재, 모든 안주가 싱겁다며 라면스프나 구운 소금을 안주로 먹는 혁재,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혁재, 술 마시다 취하면 우쿨렐레 연주하며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혁재,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혁재, 도와주다 술 마시는 혁재, 도와주고 생색내지 않는 혁재, 생색내지 않아서 고마워하는 상대와 술 마시는 혁재, 애인과 만나서 술 마시는 혁재, 서울에서 자꾸만 찾아오는 후배와 술 마셔주는 혁재, 사람 좋아하는 혁재,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면 술 마시는 혁재, 가장 먼저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마시는 혁재, 술 취하면 눈이 슬퍼지는 혁재, 요리를 잘하는 혁재, 요리를 만들어 남 주길 좋아하는 혁재, 그 요리를 먹는 사람과 술 마시는 혁재, 막걸리를 좋아하는 혁재, 정치 팟캐스트를 좋아하는 혁재, 유튜브를 좋아하는 혁재, 태극기부대나 미래통합당을 싫어하는 혁재, 그들 때문에 열 받아서 술 마시는 혁재, 경치 좋은 산보다 술이 좋은 혁재, 꽃보다 막걸리가 좋은 혁재, 이가 안 좋은 혁재, 그래도 술 마시는 혁재, 뒷목이 자주 뻑뻑하고 찌르르 하는 느낌이 드는 혁재, 그래도 술 마시는 혁재, 두통이 찾아오면 목에 파스를 부치는 혁재, 그래도 술 마시는 혁재, 기쁠 때 술 마시는 혁재, 기분 나쁠 때 술 마시는 혁재, 슬플 때 술 마시는 혁재, 남이 기쁠 때 같이 기뻐하며 술 마시는 혁재, 남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하며 술 마시는 혁재, 잠자는 시간보다 술 마시는 시간이 더 긴 경우가 많은 혁재, 밥보다 술이 좋은 혁재, 오늘도 취한 혁재, 다섯 시에 애인 만나러 가야한다며 시계를 보는 혁재, 그 애인과 술 마실 게 분명한 혁재, 오라는 데도 많고 갈 데도 많은 혁재, 오라는 데도 술 마실 곳이고 가려는 데도 모두 술 마실 곳인 혁재, 자기 자신보다 술을 좋아할 것 같은 혁재, 술이 있어 행복한 혁재, 어느 날엔가 자기 자신마저 홀랑 마셔버릴 것 같은 혁재, 걱정이 없어서 걱정인 혁재…… 나에게만 걱정인 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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