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문 씨네 추석 풍정 본문
새벽까지 깨어있다 잠들었으나 다행히 아우 집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현관을 들어서자 방에 있던 조카와 아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서너 달 만에 만나는 아들의 표정이 환해서 내 마음도 환해졌다. 얼굴에 살도 좀 오른 듯 보였다. 손자에게 고정된 할머니의 시선은 유쾌하게 분주했다. 나를 거쳐 손자에게 이어지는 내리사랑이 당신을 버티게 하는 힘일 것이다.
준비해 간 예배자료를 나눠주고 묵도를 시작으로 추석가정예배를 조촐하게 드렸다. 찬송가를 부를 때 아이들은 입만 벙긋거렸고 제수씨는 음정의 키가 맞지 않아 힘들어 했지만 어머니는 한결같이 한 박자 늦게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돌아가며 성경구절을 교독할 때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읽었다.
예배를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고3인 둘째 조카의 대학입시가 주된 화제였으나 이내 아들의 승용차 구매 계획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문득 아들 나이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을 바꾸려고 혁명을 꿈꾸던, 혹독한 시절이었으나 뒤돌아보면 모종의 낭만이 있었던, 오히려 고통 앞으로 스스로 나아가면서도 뿌듯했던 시절이었다. 20대 중반에 차와 집을 사고의 중심에 두고 당당하게 고민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용인하는 아들의 시대가 부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왔던 시대의 엄격함을 강변하고 싶진 않았다. 현실이 주는 부담과 불투명한 전망으로 인한 고뇌는 성격은 다소 달라졌을지 모르나 그것을 체감하는 강도와 곤혹스러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벅참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아들에게 소리 없이 술을 권했다. 아들도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제수씨가 바리바리 싸준 음식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우가 자기 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에 와서는, 얼마 전 선물로 받은 와인을 아들과 나눠마셨다. 낮술이라 그런지 반병씩 마신 셈인데도 취기가 느껴졌다. 아들은 거실에서 할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나는 내 방에 들어와 달고도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아들이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하루가 다 가도록 끝내 딸들은 엄마를 보러 오질 않았다. 그녀들도 며느리와 사위를 맞아 분주한 하루를 보내느라 피곤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잠깐 들러보지 않은 것을 어머니는 서운해 했을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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