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오랜만에 나를 위한 쇼핑을 하다 본문
언제부터인가 꾸미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학생 시절, 운동권 학생들의 스탠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설익은 이념을 교조로 받아들이면서 세상의 부조리와 싸움 싸우며 변혁을 꿈꾸던 시절, ‘우리’들은 누구보다 검소해야 했고 소박해야 했고 의식적으로 초라해야 했으며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해야 했다. 오히려 그런 과장된 하방의식이 자신들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런 검소하고 소박한 학생 코스플레를 통해서 어쩌면 변형된 선민의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일반 학생들과 무언가 고상한 원칙을 견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을 구별시켜 주는 기호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유치한 신원주의와 억지 하방의식은 생각보다 집요하게 머릿속에 남아 무의식을 지배했다. 뭔가 메이커 제품의 옷과 신발은 내게 맞지 않는 옷과 신발이고 명품을 들고 다니는 삶은 한 때 타도하고자 했던 부르주와의 삶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의식의 기제가 꽤 오랫동안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직장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했고, 대학원 졸업 후에는 곧바로 민중운동 진영에 투신해 오늘까지 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과 같은 선민의식 때문은 아니지만 뭔가 나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나 자신만을 위한 다종다양한 호사를 누리는 것은 반민중적이고 반노동자적인 것이라는 강박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비싼 옷과 신발, 명품 시계나 가방이 없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설사 여유가 있다하더라도 나는 분명 시장에서 중저가 상품들을 선택했을 게 분명하다.
나의 이런 생각은 아이에게도 영향을 주었는지 아들은 메이커를 선호하는 사춘기시절에도 비싼 옷이나 가방, 신발 등을 요구하지 않았고 자기가 인터넷쇼핑을 통해서 중저가 상품을 직접 구매하곤 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경제적 부담이 없으니 환영할 일이었지만 또래들에 비해 저렴한 옷과 신발만 착용하고 사춘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 물론 아들은 패션 감각이 있어서인지 중저가 옷을 입고 다녔지만 비싼 메이커 옷을 입은 친구들에 비해 초라해보이지는 않았다. 패션과 젊음의 거리에 있는 홍대에 입학하고 군대까지 다녀와서 번듯한 공기업에 취직한 애인을 둔 현재에도 아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패션을 위해 홈쇼핑을 선호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습관이란 참 집요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오랜만에 옷과 신발을 사기 위해 시장을 다녀왔다. 물론 대형할인매장의 의류 코너와 아웃렛을 이용하긴 했지만 책이 아니라 옷과 신발을 위해 한 번에 무려 10만 원이 넘는 쇼핑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땀이 많아 여름에는 주로 반바지 차림으로 다니는 나는 6벌의 세일 중인 티셔츠와 두 벌의 반바지 그리고 한 켤레의 신발을 샀다. 가격대비 가성비가 최고인 쇼핑을 한 것이다. 티셔츠는 한 벌에 만 원에서 1만5천 원 사이고, 반바지는 1만6천 원, 신발은 4만7천 원이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선호하는 디자인의 신상품들이 많아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쇼핑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메이커 신발이나 옷 한 벌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 넉넉한 쇼핑을 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그야말로 생활 속의 소소한 행복을 느낀 하루였다.
그 동안 나는 내 자신을 위한 투자에 너무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사회적 지위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나이 들어 사람들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정말 싫다. 물론 나는 그 동안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해왔고 나이에 비해 다소 젊은 취향으로 옷을 입어왔기 때문에 비싸지는 않지만 제법 세련되게 옷을 입는다는 평가를 받아오긴 했다. 하지만 옷은 유행이 있기도 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버려야 하는 소모품이다. 그 소모품을 교체하기까지 나는 언 3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절약과 검소함은 견지해서 나쁠 것 없는 생활 습관이지만, 그리고 그런 생활 습관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투자에도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최소한의 자기애는 나 자신의 품위와 대인관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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