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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소심한 중년의 슬픈 초상

달빛사랑 2012. 2. 18. 14:14

 

 

날은 흐렸다가 개고, 다시 흐렸다. 한 번쯤은 비가 내릴 법도 한데, 기다리는 비는 좀처럼 내리질 않는다. 오후가 되면서 다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베란다 의자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문득 오래 전 이맘 때, 장난처럼 만나서 소설처럼 사랑하고, 가슴 아프게 헤어진 여성과 비 내리는 홍예문 언덕길을 걷다가 들른, 조그만 카페가 생각이 났다. 몸 하나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는 우산을 쓰고 마냥 걸으며 나는 그녀에게 죽은 형에 대한 길고 우울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헤어졌다. 그때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20살의 감상과 치기로 꾸려가던 나의 사랑들. 숱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현실이 아닌, 추상적인 상념과 연결된 희망일 뿐이었다. 술과 방황 속에서 이루어가던 그 당시의 젊음이란, 흡사 전염병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논리보다는 가슴이 앞섰던 시절. 우리에게 부가되던 시대의 중압감에 지나치게 엄살을 부리던 그런 시절 말이다. 그렇게 저렇게 시간은 가고, 숨찬 20대 초두를 열정이라 착각한 치기(稚氣)로 장식한 우리들은 아련한 추억들만 간간히 호명하며 각자의 자리에 이렇게 저렇게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열정이란 현실적 균형감의 획득혹은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같은 의미의 말이 되었다. 자제할 줄 아는 나이, 소모적인 일에 고개를 돌리는, 어쩌면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응전은 치기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만큼, 아니 충분히 우리들은 소심해진 것이다. 소심함은 한 편으로는 모멸스럽지만, 때로는 무엇보다 편리한 처세이자 편안한 마음의 상태일지 모른다. 우리는 소심함을 신중함이라 함부로 의역하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사는 것이다. 날은 완전히 개었다. 비는 내리지 않을 모양이다. 평온하게 깊어가는 주말 오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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