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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첫 번째로 찾아왔던 장마는 생색만 슬쩍 내고 일찍 끝났다. 이윽고 극강의 더위가 찾아왔다.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방울 닦아내며 일찍 끝난 장마를 향해 툴툴거렸다. 장마는 매년 삼복 전후에 찾아와 한여름 열기를 식혀주는 고마운 빗물의 시간이었다. 그러니 별다른 역할도 없이 일찍 떠나버린 장마가 불만일 수밖에. 그런데, 내 툴툴거림을 들었던 것일까, 다시 찾아온 장마는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지 않은 느낌은 일종의 기시감인데, 이런 식으로 화풀이하듯 다시 찾아와 집중호우를 뿌리는 장마는 늘 물난리를 동반했다. 어제 그제 비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한여름 소나기라고 생각했는데, 예보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랫녘은 집중호우로 난리가 아니었다. 제방은 무너지고, 논과 밭, 집과 도로는 침수되고..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추적추적 내렸다. 우산 없이 집에서 전철역까지 걸어가도 옷을 적실만큼은 아니지만, 더러 펼쳐진 우산들이 보였다. 대개 나이 든 사람들은 우산을 썼고, 근처 문일여고 학생들은 우산을 접은 채로 들고 걸었다. 나도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눈 떴을 때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비는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다가 오후가 되면서 점차 갤 거라는 예보였다. 물론 오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약한 비가 간헐적으로 내릴 거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귀찮아서 우산을 두고 나온 게 아니라 예보를 믿은 거다. 어젯밤 술자리가 길어진 김 선배는 9시 30분쯤 전화해 점심 이후에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오전 출장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숙취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안다. 수화기 너머..

사실 비는 자주 왔다. 왔다기보다 노인네 오줌발처럼 질금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제법 비다운 비가 왔다. 아니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비다운 비라니, 그렇다면 비답지 않은 비도 있단 말인가? 대차게 내리든 질금거리며 내리든 빗방울 툭툭 떨구면 모두 비다. 다만 사람 중에도 다양한 외양, 다양한 성정이 있듯 비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도 각양각색이다. 소나기를 좋아하고 이슬비를 좋아하고 해 떴는데 내리는 여우비를 좋아하고 폭풍과 함께 내리는 폭풍우를 좋아하기도 한다. 나는 폭풍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세게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 난리만 나지 않는다면 사흘 낮 사흘 밤 비 내렸으면 좋겠다. 점심에 남부 마을교육지원센터에 나가 있는 후배 현이가 교육청을 찾아와 점심을 사 ..

60대 사내의 태만은 무모하다. 언제부터인가 상상력이 사라지고 나의 의식은 경화(硬化)되고 있다. 치열한 삶에 관한 경외도 없다. 말라가는 상상력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무기력이거나 무의미한 것에 관한 헛된 욕망이다. 어설프게 설계된 일상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라 그것의 위장된 속도감을 치열함이라고 합리화하며 하루하루 우민(愚民)으로 잘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척 자유로워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나는 지금 짧게는 50분 전, 길게는 5일 전의 일조차 자주 까먹으면서 서슴없이 자유를 말하고 있다. 늘 이런 식이다. 내 인생의 대전발 0시 50분 기차는 이미 떠났지만, 기다리다 보면 기차는 다시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나 착각은 자유이다. 그놈의 대전발..

생전의 이가림 시인과는 단 한 번도 술자리에서 대작해 본 적이 없다. 술꾼은 술자리를 통해 상대에 관한 친밀함과 교감의 수위를 결정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가림 시인은 내게 낯선 존재다. 물론 같은 문학단체 소속이었으므로 한자리에서 술을 마신 적도 있고, 그의 작품을 오래전부터 이미 이미 만나왔던 터라서 '시인 이가림'은 낯설지 않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거나 상대의 술잔에 술을 따른 적이 없을 뿐이다. 오늘은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비록 생전에는 특별한 교류가 없었지만, 시를 쓰는 문우로서 그의 너무 빠른 죽음과 루게릭이라는 질병의 처참함을 기억하면서 그를 진심으로 추모했다. 본래 죽은 자가 산 자들을 모으는 법, 덕분에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들..

언젠가 말했듯, 금요일은 묘해. 흡사 마법에 걸린 날이거나 마법을 거는 날 같다니까. 근래 안 하던 짓, 이를테면 오래 격조한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확인해 본다든가 자주 가는 단골집 사장의 안부를 묻는 일 따위를 하게 만든다니까. 조금 더 젊은 날의 금요일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마음만 먹을 뿐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람이 그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연락해 사람을 만나지는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그리움조차 관성일까? 요즘 더욱 외출을 삼가고 술 약속도 잡지 않고 있다. 흡사 반려견 견주가 퇴근하면 곧바로 집에 오듯 나도 퇴근하면 곧바로 귀가한다. 오디오 때문일까? 사실 음악은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휴대전화와 MP3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와 연주곡이 수천 곡 저장되어 있고, 멜론, 스포티파이..

오늘도 거리는 펄펄 끓었다. 종일 에어컨을 켜고 생활했더니 머리가 띵하고 자고 나도 개운하지가 않다. 여름이면 늘 겪는 일이다. 여름과 폭염은 아마도 내 수명의 상당 부분을 갉아먹고 있을 거다. 오전에 쿠팡에서 주문한 서브우퍼가 도착했다. 실제 받아 보니, 사진에서 본 것보다 크기가 무척 컸다. 서브우퍼는 진동이 커서 방진 패드를 놓거나 스파이크를 박아야 한다. 그리고 놓는 자리도 매우 중요해 전체적으로 기기들을 다시 배치했다. 많은 소스 기기를 연결해야 하는 뮤지컬 피델리티 프리앰프와 파워앰프를, 각종 연결 단자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위로 올리고, 두 앰프가 있던 자리에 서브우퍼를 놓았다. 하지만 스피커 선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두어 번 ‘치직!’ 하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 전에 구매한 야마하 네트워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