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그가 없는 빈 사무실에서 (06-12-월, 흐리고 소나기) 본문
새로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후배 황보가 인사차 내 방에 들렀다. 웃고는 있었지만 내심 새로운 보직에 대한 걱정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누군가의 후임으로 온다는 건 불편한 일이다. 특히 안팎으로 인정받던 사람의 후임으로 오는 일은 잘해야 본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배도 그것을 알기에 더욱 부담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황보는 명민하고 경험도 많으며 추진력도 있는 후배다.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리라 믿는다.❙ 총무과에서 인사팀장과 실무 책임자가 나를 찾아와서 새로운 계약 내용을 설명했다. 현재의 계약 내용으로는 월급의 최대 금액에 한계가 있으니 근무 시간을 현재보다 두 배 가까이 늘려 주 35시간으로 하면 월 600만 원 정도까지 지급할 수 있다며, 그런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인사팀장의 말에 의하면 교육감이 그렇게 언질을 준 모양이다.❙ 나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난 지금의 근무 조건이 더없이 좋다. 월급은 제시한 것의 반밖에 안 되지만 내 시간을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만약 내가 주 5일 근무를 하게 되면 나는 시인으로 살기를 포기해야만 한다. 진짜배기 공무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돈도 좋지만, 무엇보다 나의 정체성은 시인이다, 게다가 그런 조건으로 계약하려면 일단 사표를 낸 후 다시 공모 절차를 걸쳐 입사해야 한다는데, 그것도 민망한 일이다. 공모라서 만약 나의 지인이 원서를 넣게 되면 결국 그와 내가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사직과 재입사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단지 근무 시간을 연장하고 그만큼 급여를 더 준다면 마음이 움직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아들 결혼 전이라서 돈을 좀 모아놓아야 한다)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뭔가 나를 위해 판을 만드는 듯한 느낌의 채용방식은 싫은 것이다. ❙결국 총무과에 전화해 기존 계약 내용대로 근무하겠다고 최종적으로 밝혔다. 전화상이었지만, 담당자의 표정이 환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공모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경비가 필요하다. 내가 그 부담과 수고를 덜어준 것이다. ❙오랜만에 갈매기에 들렀다. 막걸리 3병 마시고 돌아왔다.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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