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 같은 여름 (06-14-수, 맑음) 본문

여름은 늘 그래요. 친절한 얼굴로 다가오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질어지곤 합니다. 알면서도 깜짝 놀라요. 깜짝 놀라지만 무섭지는 않아요.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 같다니까요. 어제 영화 <Dungeons & Dragons: Honor Among Thieves>를 보았습니다. 벌써 지하 감옥(던전)과 용(龍)이 나오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의 영화 맞아요. 신나는 모험을 하며 악당도 물리치고 보물도 찾고 가족 간의 사랑도 확인하는 판타지 영화였지요.❚어느 시대고 악당은 있게 마련이겠지만, 판타지 모험 영화의 악당은 참 어설퍼요. 물론 주인공들도 대개 어설퍼서 그들의 여정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만 알다시피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은 늘 하늘이 보살펴 주잖아요. 위기에 빠져도 걱정할 게 없는 게 ‘하필이면 그때’, 그 위기의 순간에 지나가던 누군가가 도움을 주게 마련이거든요. 그리고 또 ‘하필이면’ 그 사람이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인 건 필연이지요. 이 클리셰가 전 나쁘지 않습니다.❚아무튼 제게 여름은 바로 판타지 영화 속의 악당 같다는 느낌입니다. 온갖 똥폼을 다 잡으며 “우왕, 무섭지~!” 하지만, 뭐랄까요, 비법을 간파당한 마법사 같다고나 할까요. 여름의 짜증과 몽니가 괴롭고 귀찮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은, 오히려 가끔 연민하게 되는 어설픈 악당 같습니다.❚어쩌면 서운한 건 여름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가 유독 여름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사람인데, 누가 보면 여름이 나만 콕 짚어 괴롭히는 줄 알 거 아니에요. 그건 맞는 말입니다. 여름은 죄가 없어요. 그냥 나랑 안 맞는 거지요. 하지만 여름도 내 마음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고 봐요. 4계절 중에서 유독 여름에만 내가 맥을 못 추는 건 사실이니까요. 악전고투하는 나의 처지에서는 여름을 악당처럼 느낄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나는 늘 여름과 관계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내 체질이 변화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름을 좋아한다면 나도 여름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완전히 척지거나 벽을 견고하게 쌓아갈 생각은 없습니다.❚무엇보다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여름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내 마음의 발로라는 걸 여름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악당이라고 표현해서 삐졌으려나? ‘악당처럼’이란 표현에서도 알겠지만 그건 비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더 뜨거워지기 전에, 여름이 열폭하기 전에 살살 비위 맞춰보도록 노력해야지 어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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