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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그날, 그 눈 내리던 백마역을 추억하다 (12-23-금, 맑음) 본문

일상

그날, 그 눈 내리던 백마역을 추억하다 (12-23-금, 맑음)

달빛사랑 2022. 12. 23. 23:55

 

아랫녘 폭설 관련 뉴스를 보았다. 적설량 60~80cm라니, 도시와 마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 만큼 엄청난 양이다. 방송에선 ‘기록적인 폭설’이라고 했다. ‘기록적’이란 말은 폭설의 공격성을 중화시킨 진부한 방송용 표현이다. 이 표현현은 일상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생계에 치명적인, 폭설의 위험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따라서 제설과 망가진 시스템을 복원해야 하는 관의 책임 또한 그만큼 가벼워진다. 언어의 사용은 그래서 항상 정치적이다.

눈만 많이 내린 것이 아니라 한파까지 동반한 폭설이라서 주민들은 당분간 힘겨운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이거나 공감 능력을 의심받을 발언일 것이다. 며칠 전 나는 밟기 좋게 내린 눈이 너무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물론 그때만 해도 아랫녘의 폭설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폭설 피해자들이 보기에 내린 눈 위에 눈꽃을 찍고, 눈사람을 만들며 강아지처럼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철없어 보였을 것인가. 상황에 관한 수용 태도는 언제나 다층적이다. 열린 마음이 아니면 다른 부면을 보지 못한다. 


오래전 대학 시절, 백마역 근처 주점 ‘착한 농부의 썩은 사과’에서 홍은동 천사와 함께 술 마시고 나왔을 때, 엄청난 폭설을 만났다. 두려움보다는 역사(驛舍) 앞에 펼쳐진 소읍의 너른 들판을 하얗게 뒤덮은 눈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때, 일부러 만든 상황은 아니었지만, 흔한 청춘 영화나 연애소설처럼 기차는 물론 서울로 가는 시내버스도 이미 끊겨 있었다. 버스는 몰라도 기차 시간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차 시간 임박해서 술집을 나온 것은 누가 봐도 의도한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발을 동동거리거나 조바심 내지 않았다. 홍은동 천사도 내게 ‘의도한 거 아니야?’ 하는 의심의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의도했든 안 했든 벌어진 상황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만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마음의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니라 너무도 예쁘고 소담스럽게 내리던 눈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하늘로부터 지상까지의 공간을 조밀하게 채우며 쏟아지던 눈은 백마역사 주변의 가로등 불빛을 받아 환상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눈 내리는 모습을 숱하게 보아왔지만 그날 밤 마주했던 함박눈의 정경처럼 아름답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눈은 본 적이 없다. 내 옆에 홍은동 천사가 있었으니 말해 뭐 하겠는가.

몇 년 전, 연세문학회 동료들과 다시 그 동네를 찾았을 때, 이미 읍내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버렸고, 백마역 또한 제법 규모 있는 현대식 역사로 개축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천사와 내가 왼쪽에 두고 눈 속을 걸었던 철로뿐이었다. 물론 가장 많이 변한 건 나일 테지만……. 이후 애인과는 모종의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고 나는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풍찬노숙의 시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 또한 건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동료들로부터 전해 들은 건 그녀와 헤어지고 1년 후였다. 이후 그녀가 걸어간 길과 내가 걸어온 길은 결이 너무 달라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녀는 졸업 후, 모 일간지 기자가 되었고 일본 특파원이 되었다가 그 신문사 계열 종편방송국의 부국장이 되었다는 게 재작년에 들은 마지막 소식이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오늘처럼 폭설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때, 백마에서 만났던 눈 내리던 풍경과 머리에 눈을 인 채 조용히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집에 전화하던 천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참 멀리도 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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