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2023년 대입 수능 시험ㅣ아버지 생각 (11-17-木, 맑음) 본문
오늘 전국의 수험생들이 2023년 대입을 위한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내가 대학 입학할 당시에는 대입 시험의 명칭이 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학력고사였다. 고사장은 부평고, 낯선 동네라서 시험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8시 30분, 1교시 국어 과목으로 시작한 고사(考査)는 5시 과학 시험까지 꼬박 7~8시간이 걸려 끝이 났다. 종일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시험이 끝났을 때, 18세 소년들은 모두 5년은 더 늙어 보였다. 물론 시험을 무사히 끝냈다는 홀가분함 때문에 표정이 밝아 보이던 학생들도 있었고, 예상보다 시험을 못 봤다고 생각한 몇몇 친구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재수학원을 알아봐야겠어"라는 말을 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고사장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대입시험 때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잊지 못할 장면은 바로 아버지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1교시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창밖을 보니, 아버지께서 정문과 담장을 오가며 까치발로 고사장 쪽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서성이던 아버지는 교문 쪽으로 와서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는 추운 겨울 혼자 그렇게 학교 주변을 서성이다 귀가하셨는데, 정작 나는 그런 아버지가 고맙기는커녕 시험 치르는 내내 아버지가 신경 쓰여 약간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않았다. 별로 말이 없던 부자는 냉전 아닌 냉전을 일상적으로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내가 시험 치르는 학교 앞에 와서 두어 시간을 서성이다 기도를 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은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요동치게 만들었다.
전교 1등을 하던, 좋은 친구를 만난 고3 중반기 이후를 제외하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 그다지 공부에 집중하거나 학교생활에 충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고사 당일에도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갈 생각부터 하던 철부지였다. 원래는 시험 당일에도 친구들과 한잔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결국 날라리 친구들에게 적당히 핑계를 대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내가 올 시간에 맞춰 각종 반찬을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 반찬들을 보는 순간 집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엄마만 "시험 잘 봤냐"라고 물어오셨다. "네, 그런대로 잘 봤어요."라고 대답하는 내 마음이 무척 편하고 너그러워져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가족들이 모였을 때 아버지가 다녀간 걸 모두에게 말하며 아버지 덕분에 시험을 잘 볼 수 있었다고 인사치레의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가 말 없는 아버지와 나의 마음의 거리가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후 고교 시절과는 질이 다른 질풍노도의 대학시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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