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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늦가을 오후는 나를 닮았구나 (11-06-日, 맑음) 본문

일상

늦가을 오후는 나를 닮았구나 (11-06-日, 맑음)

달빛사랑 2022. 11. 6. 00:18

 

많은 것을 품었으나 이제는 결국 마른 풀잎만 지천인 늦가을 오후의 대지는 나를 닮았다. 추억이 없다면 겁쟁이들은 어떻게 이 가을을 견딜까. 끝끝내 가장 소중하게 지니고 있다가 새로운 계절, 겨울 앞에 꺼내놓을 건 추억밖에 없구나. 추억은 얼마나 힘이 센 것인가. 추억이란 단어를 쓰고 보니, 오래전 Y와 걷던 가을날의 신포동 길들이 생각난다.

 

당시, 사소한 복장과 흔한 머리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 있어야 했는지 그녀는 모를 거다. 그때 나에게는 이성 앞에서 나를 빛나게 해 줄 세련된 옷들이 별로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옷에는 그리 돈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철마다 어울리는 옷을 사기에는 내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촌스럽다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걸 보면 흔한 옷을 입어도 내 나름의 개성이 돋보이도록 코디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적어도 내 20대에 가장 오랜 기간 만난 이성은 Y였으니 인천 곳곳의 추억도 Y와 함께한 추억이 많을 수밖에. 우리는 참 사랑에 서툴렀던 것 같다.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편지와 선물로만 마음을 표현했지. 내가 미술 실력이 꽤 있다는 것도 사실 Y와의 연애를 통해서 새삼 알게 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헤어지고 나서도 (아니다. 우리는 명시적으로 헤어지자, 선언하고 헤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만나는 횟수가 뜸해지고 그러다 자연스레 연락을 안 하게 되고, 또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불쑥 만나고.... 내가 서둘러 결혼하기까지 그 패턴이 반복되었다) 나는 이내 다른 이성을 만났지만, 그녀는 늘 혼자였던 것 같다. 내가 모르는 연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의 이야기를 듣거나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별의 아픔을 달래며 나에 관한 관심을 이어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그녀의 표정에서 그것을 (나에 관한 미련을 더는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 읽을 수 있었다. 너무 해맑게 인사를 해왔고 심지어 나에게 악수까지 청했거든. 그게 지고 싶지 않은 호승심인지 정말 그런 마음의 상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맙고도 서운하고도, 아무튼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건, 아무리 순진한 대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애인과 키스 정도는 나눌 법도 했는데, 우리는 정말 철저하게 플라토닉한 사랑만 했다는 거다. 물론 가끔 손을 잡고 걷거나 어깨동무 정도는 하긴 했지만, 입을 맞추거나 그 이상의 스킨십은 안 했던 것 같다. 그녀가 성적 매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그녀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양가 부모끼리도 다 알고, Y의 언니들과도 무척 친한 사이다 보니, 애인이라기보다는 오랜 친구 같은 감정이 강했던 게 아닌가 (지금에서야) 추측해 보긴 하는데..... 그래도 그렇지. 아무튼!  그러니까 참 묘한 사랑을 꾸려 간 거지. 연인들이 하는 각종 치레는 다 따라 했으면서도 정작 입을 맞추거나 그 이상의 스킨십은 애초에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발전하지 못했던 걸까. 당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그 또래의 흔한 일탈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다. 수녀와 스킨십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현재의 Y가 이 말을 들으면 짜증을 내려나, 아니면 '하하하' 웃으려나. 내가 그녀의 마음을 100%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더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흔한 희망)을 위해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둔 건지도 모르겠고. 사실 그건 나의 수법인데, 설마 그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렇다면 우리 사랑이 어느 순간 정체된 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어놓은 금 때문이라는 말인데,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긴 한다. 청춘들의 퍼피 러브란 그런 것일 테니까. 

 

 

Y의 DM을 받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60대가 되서 오랜 친구에게 연락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녀 또한 나와 함께했던 스무 살 시절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긴 한 걸까.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가 다 쇠어서 가을날, 옛 신포동 길을 함께 걷던 추억을 되새겨보는 일은 아름다운 일인가, 아니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는, 부질없는 청승인가. Y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둘 다인 것 같기 하고......  다만 그녀와 내가 함께했던 추억은 여전히 내 젊은 날의 소중한 자산이고, 그녀의 허락 없이도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내 박제된 시간들이다. 설사 그녀가 "옛날 얘기는 뭐하러 해. 다 지나간 일인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라며 짐짓 다 잊은 듯 행동한다 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내 추억은 여전히 내 것이고, 추억은 언제나 힘이 세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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