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3월 14일 월요일, 흐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본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가 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매 순간 태어나고 성장하고 번식하고 소멸한다. 바위 위에 앉는 시간은 이끼가 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먼지는 더께로 앉아 생명을 키운다. 죽음조차도 끝이 아니다. 완벽하게 소멸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아무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건 없다’라는 사실뿐이다. 음악은 시간 위에서 춤을 춘다. 그림은 평면에 붙박인 채 늙어간다. 시와 소설은 독자와 만나면서 항상 지면 밖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봄은 오고 있고, 왔으며, 이미 가고 있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대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은 몹시도 처연한 바람(願)이다. 그 누가 행복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겠는가. 하지만 늘 불행은 우리의 삶 주변에 오래 머물며 우리를 지치게 한다. 며칠 전의 기억은 단지 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악몽이라도 상관없으니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오후가 되면서 비가 내렸다. 옥상에 올라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보며 후배 H를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이곳에 언제 올 거예요?’라고 물었다. ‘이곳’이란 또 다른 후배 K의 시부 빈소였는데, 사실 나는 후배의 남편을 잘 알지 못한다. 조의금을 보냈지만 그건 그의 남편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K와의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의 빈소에 갈 일도 없거니와 설사 간다고 해도 그것은 퇴근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 황당한 전화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잠시 후 불안함이 머리를 스쳤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H의 목소리, 그 특유의 어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증이 찾아올 때마다 내는 목소리,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상태로 툭툭 던지는 그 목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들은 것이다. 전화를 걸 당시 그녀의 목소리에서 취기도 느껴졌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혼자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나는 그녀가 지금 무척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남편과 함께 병원을 다녀왔다며 투덜댔다는 이야기를 후배 장에게서 들은 바 있다. 남편이 그녀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는 건 다시 증세가 심각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어느 날, 머리를 박박 밀고 우리 집 근처에 와서 전화를 걸었을 때의 모습과 이혼을 하고 강원도 어딘가로 홀로 여행을 떠난 후, 그곳에서 행려병자처럼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후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하고 치료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어느 순간 다시 도지는 그녀의 조울증은 그녀 자신은 물론 주변을 무척 힘들게 했다. 한동안 차도가 있어 약도 착실히 먹고 음반을 내는 등 많은 활동을 시작해 안심했는데, 오늘 다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 특유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조증이 심각할 때 내는 그녀의 목소리를…… 우울하고 안타깝다. 그런 상태가 되면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여행하다가 지치고 망가진 몸으로 돌아오곤 한다. 무엇이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내 추측이 빗나갔으면 좋겠다. 그녀는 우연히 ‘아플 때의 목소리’를 냈던 것인데 내 쪽에서 오해한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최근 그녀가 보인 여러 정황이 내 확신을 더욱 굳게 만들고 있다. 어쩌나, 내가 해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 후배, 안쓰러워서 어떡하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 중인 봄날, 맑음 (0) | 2022.03.16 |
---|---|
3월 15일 화요일, 맑음 (0) | 2022.03.15 |
봄비 내리다 (0) | 2022.03.13 |
3월 12일 토요일, 종일 흐림 (0) | 2022.03.12 |
수첩을 구매하다 (0) | 2022.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