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생각보다 포근한 (2021-11-25-목, 맑음) 본문
생각보다 포근한 하루였다. 6시쯤 일어나 혈압약과 고지혈약을 챙겨먹고, 노트북으로 뉴스를 보다가 다시 잠이 들어 8시쯤 깼다.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다. 뉴스는 오늘도 재미 없었다. 살인과 폭력과 사기와 정치꾼들의 허언과 위선과 교통사고와..... 보고 들으려면 마인드 콘트롤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으며 현실을 견뎌가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오전에는 이발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피부과에 가서 눈 옆의 점을 뺄까도 생각했는데, 그것도 그만두었다. 옷과 신발을 정리해서 근처 고물상에 가져다 주려고 했던 일도 그만두었다. 귀찮았기 때문이라기보다 맘 속에서 '아직은 (때가 아니야)'이라는 생각이 보풀처럼 돋아났기 때문이다. 머리는 아직 흉해 보일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눈 옆의 점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신발과 옷가지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대신 냉장고를 정리했다. 김치를 썰어서 작은 통에 넣은 후 큰 통을 닦아 놓았고, 시든 고추는 썰어서 냉동실에 넣어놓았다. 유통기한 지난 마요네즈와 케찹은 미련없이 버렸다. 누나가 준 강경 오징어젓갈도 당장 먹을 만큼만 덜어 작은 용기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냉동실에 있던 닭죽을 해동해서 끓여 먹었다. 한 달 전에 만든 달래 양념간장도 작은 용기에 덜어놓았고, 생김도 6등분 해서 팩에 넣어놓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주말쯤에는 이발도 하고 신발과 옷도 정리해야겠다. 뭔가를 정리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새로운 물건을 구매할 때와는 종류가 다르게 기분이 좋다. 책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어느 순간부터 비워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신도 그렇지 않을까. 부질없는 상념을 비워내야 맑은 영혼이 들어찰 테니까.
사진작가 후배 하나가 병든 아내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모양이다.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주변의 '누나'들이 뒤통수를 맞았다며 일제히 분개하고 나섰다. 그녀들은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나에게도 전화를 걸어 그 후배를 성토하곤 한다. 사생활이긴 하지만,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다. "형, 불같이 이는 사랑을 어떻게 막을 수 있어요?"라고 항변할까 봐 걱정이다. 이미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사랑 없는 부부생활의 환멸에 찬 시간을 견디며 사는 게 능사일까? 그의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이 많다. 잠시 찾아온 감상에 침윤된 나머지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할 말이 있겠지만, 만약 자기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무지 해줄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 신열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수밖에...... 도덕성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건 후배가 감당해야만 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후배의 유전자 속에 있는 '바람둥이' 형질이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건 질병의 문제다. 이번 경우는 어떻게 미봉되더라도 추후에 동일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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