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작가의 고집이 사물과 만나 발산하는 아름다움이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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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터키의 속담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이 다리를 발견했을 때쯤, 정신 나간 여인은 이미 강 건너편에 있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지요. 일이든 사람(랑)이든, 무언(누군)가에 미쳤던 시절, ‘몰두(沒頭)’였을 겁니다. 합리적 사고나 판단이 유예된, 혹은 대상의 아우라에 자발적으로 침윤된 도저한 집중, 핀이 나간 정신 상태. 지금은 청승만 남아 자주 마음을 다치지만 다시 한번 무언(누군)가에 전생을 걸(어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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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환 형은 참 고집스럽습니다. 요즘 같은 맘몬(mammon) 시대에 이 형은 다른 허다한 사진작가들과는 달리 돈도 안 되는 ‘자신만의 사진’만 집요하게 찍고 다니고 있으니…… 거참. 그것도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옛날 사진관에서나 볼 수 있는 차광막(遮光幕)이 있는 커다란 아날로그 카메라를 들고서 말입니다. 형은 한밤중이나 새벽, 불현듯 포구나 소금 창고나 숲속을 찾아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리다가,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몇 분간의 시간 동안 게릴라처럼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곤 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사진은 나에게 시간과 빛의 예술로 다가왔습니다. 형의 모든 사진은 빛의 걸음걸이와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견딘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사진이었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대지의 사물들도 건환 형의 그러한 노력에 답을 해주듯 범인(凡人)의 눈으로는 좀처럼 포착하기 힘든 미세하고도 미묘한 몸짓을 기꺼이 보여준 걸 보면, 형과 사물 사이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나는 사진 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런 형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사물을 대하는 그의 겸손함과 예술을 향한 열정, 앞서 말한 ‘몰두’하는 사람의 비범한 아름다움을 느끼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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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전시된 사진들 역시 건환 형의 고집스러운 작업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래된 마룻바닥이나 낡은 벽, 버려진 갱목이나 침목들이 간직한 다양한 결들을 집요하게 탐색하더니 이번에는 소금, 소금밭입니다. 그 사진 속 장면들은 흡사 수만 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본 사막 같기도 하고, 바닷속 산호 같기도 하고, 전인미답의 오지 같기도 하고, 가뭄에 갈라진 강줄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보는 사람의 상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물에 깃든 시간의 흔적을 탐색하던 형의 눈길이 도달한 곳이 여타의 생의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 소금밭이라니, 형이 의도했든 안 했든, 사진들이 던지는 전언(傳言) 속에서 심장(深長)한 의미를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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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소금 결정과 그 결정을 품고 있는 검붉은 갯벌이(이거나 토양이) 만들어내는 무정형의 환상적인 이미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좋은 의미에서) ‘제멋대로 살아온’ 작가로서의 그의 삶이 녹아들어 있는 모습이거나, 소금을 뿌려주고 싶은 시대의 추문(醜聞)들이 난장을 펼치는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환상적인 세계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하면서 형은 분명 보이는 것 속에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장엄하면서도 순정한 숨결을 느꼈을 게 분명합니다. 그 시간은 또한 삶에 대한 경외를 느끼는 시간이자 헛것에만 주목하는 부박한 인간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이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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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말했지만, 무언가에 미친 사람을 나는 좋아합니다. 그들의 도저한 집중, 그것이 발산하는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는 예술가의 개성이자 뚝심일 겁니다. 나는 뚝심 있는 건환 형의 작업을 앞으로도 응원할 겁니다. 예술조차 환금성을 좇는 오늘과 같은 세태에, 형처럼 특별한 ‘예술 건달’ 한 명쯤은 있어야 예술 판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그는 현재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예술을 올곧게 보여주고 있는, 보기 드문 예술가인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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