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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너희가 가난한 시인의 소소한 행복을 아느냐? 본문

일상

너희가 가난한 시인의 소소한 행복을 아느냐?

달빛사랑 2020. 8. 20. 21:31

생전의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 여사
카를 슈피츠베크 [Carl Spitzweg]의 '가난한 시인'

 

 

 

남인천세무서로부터 목돈이 입금되었기에 무슨 돈인가 했더니 2019년 귀속 근로장려금이었다. 나라로부터 일 열심히 하라는 장려금을 받고 보니 마치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한 거 같다. 다만 재산이 2억 원 미만에 일 년 소득 금액이 3천만 원 미만인 세대만 지원하는 것이라는데, 그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받아 마땅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확실히 가난한 시인이 틀림없다. 나의 가난을 국가가 인정하고 이렇듯 지원금을 주니 말이다. 천상병 시인이 문득 생각난다. 

 

그런데 나의 가수인 혁재는 ‘가난한 시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늘 내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시인인데, 어째서 ‘가난한’이란 표현을 쓰냐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사실 그는 상황 언어와 수사적 언어의 범주를 혼동하는 것이다. 물리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은 명백히 다른 범주다. 내가 결코 정신마저도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혁재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가난한’이란 표현을 가끔 쓰는 것은 언어의 친교적 기능이거나 일종의 수사적 표현일 뿐인데, 나를 너무도 좋아하는 혁재는 그 어떤 이유에서건 시인이 가난하다고 말을 하는 건 싫다고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언어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가 반영되게 마련이고, 인간은 언어적 동물(호모 로퀜스, Homo loquens)임이 틀림없다면 혁재의 말도 일리는 있다. 자꾸 ‘가난한’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나 자신도 모르게 피폐해진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또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혁재는 후자를 염려한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가난한 시인’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난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 다만 나는 치열하게 살았고, 나의 가난에는 이유가 있으므로 절대 부끄러워하진 않는다. 오히려 ‘친구에게 보증 서준 사건’ 이후로 나는 더욱 문학에 천착할 수 있었고 돈 버느라 보지 못했던 다양한 부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처럼 넓은 평수 아파트에 살면서 고급차를 몰고 다녔다면 아마도 나는 예술가의 삶에서 무척 멀어졌을 게 틀림없다. 설사 문학(文學場)의 언저리에 있으면서 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예술가연(然)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은 위선적인 삶에 불과하다. 나는 확실히 가난해지면서 더 높고 넓고 깊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절대 부등가 교환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막걸리나 한잔 마셔야겠다. 엊그제 귀현 형이 미리 결제해 놓은 술값도 있고 하니, 갈매기에 들러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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