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고교 동창들, 송도와 연수동에서 만나다 본문


얼마 전, 부친을 여읜 친구가 장례식에 도움을 준 친구들을 모아 저녁을 대접했다. 모임 장소는 송도 신도시에 있는 횟집 ‘시리온’. 날도 궂고 장소도 멀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인지 친구 은종이가 예상했던 스무 명보다는 적은 수의 친구들이 모였다. 대부분 기업의 간부이거나 약사를 포함해 사업을 하는 친구들이고 두어 명은 퇴임 직전의 공무원, 또 두어 명은 퇴직하고 집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며 백수 생활을 하고 있다.
여행 가이드가 되어 해외는 물론 전국을 누비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친구도 하나 있는데, 당사자 말을 들어보면 여행 가이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충이 많은, 그야말로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피곤한 노동이었다.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애로사항이 많았다. 아무리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아다녀도 자발적으로 하는 여행과 일로써 하는 여행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 다른 노동처럼 애로사항이 있다고 해도,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돈 벌면서 찾아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공짜 여행한다고 생각해.”라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그건 사실 하나마나한 이야기였다.
또한 공무원 친구들은 주말 다중이 모이는 술집이나 노래방 등에 가지 말라는 지침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면 등을 돌리고 앉았다. 행여 해당 사진이 SNS에 올라가 감사팀에서 문제 삼으면 골치아파진다는 게 그들 말이었다. 퇴임하고 백수가 된 친구는 아내와 함께 참석했는데, 아내는 신한은행 부지점장을 하다가 얼마 전 퇴직하고 요즘에는 작은 회사의 경리실 책임자로 출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를 위해 빨래도 하고 찌개도 끓이는 등 안 해본 가사를 챙기느라 주부습진에 걸렸다고 너스레를 늘어놓다가 친구들에게 지청구를 먹었다.
해병대 출신에 성정이 다혈질인 친구 하나는 올해 1월, 기어코 사고를 쳤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는 구리(銅)무역을 하는 친구인데 술을 마시다가 주차된 차를 비켜주러 나갔다가 접촉사고를 냈고 누군가가 음주가 의심된다며 신고를 한 것이다. 문제는 법적으로는 음주운전이긴 하지만(음주 상태에서 운전석에 앉아 시동만 걸어도 음주운전으로 처벌된다) 운전 거리도 짧고 다른 차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다 낸 사고이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경찰차가 와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니 흥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욕설을 하고 음주 측정을 거부하며 난동을 부렸고 그 과정에서 쓰러져 머리가 깨져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응급실에서도 간호사들에게 고성을 지르며 주사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날 함께 있던 친구들이 보기에도 정도가 어찌나 심하던지 친구만 아니었으면 따귀라도 올려부쳤을 거라고 한다. 서너 달 지난 이야기지만 그때를 생각하면서 친구들은 “어휴!” 하면서 도리질을 쳤다. 당사자인 친구는 오늘도 당시 상황의 억울함을 이야기했지만 누가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난동’이어서 오히려 친구들의 지청구를 들었다.
나도 오래전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돼 면허가 취소됐던 적이 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겨울에 대리운전을 불러놓고 히터를 켜놓기 위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고, 대리운전자가 오면 이동이 쉽도록 길가 쪽으로 차를 빼놔야지 하다가 순찰 중인 경찰에게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만약 그때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음주운전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더 큰 사고를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술이 문제다. 맨정신에는 결코 운전대를 잡을 리가 없는 인사들이 술만 먹으면 호기를 부리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밤이 되면서 많은 비가 내렸다. 일행들은 횟집에서 나와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LP 음악 카페가 있는 연수동으로 이동했다. 연수동 친구들이 자주 찾는 카페라고 했다. 친구들은 청소년기에 즐겨 들었던 올드팝을 신청해서 들으며 옛날 추억에 빠져들었다. 신청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친구들은 저마다 디제이가 되어 해당 음악과 가수의 정보를 ‘굳이’ 설명하며 따라불렀다. 몇 명은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는데, 사장님이 박수로 호응해준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는 늘 있는 풍경인 모양이었다. 다른 자리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만나면 도무지 화젯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흡사 말 못하고 죽은 귀신들이 붙은 사람들처럼 모두가 수다쟁이가 된다. 자신이 살아왔고, 현재 살아가는 사회적 신분이나 위상과는 무관하게 유치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하고 가끔은 밉잖은 욕설도 서로에게 날린다. 그건 아마도 추억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스레 타임슬립(time slip)이 이루어져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가끔 위화감을 한껏 조성하는 친구들도 없진 않지만, 대개는 형편과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히 소년이 되는 것이다. 그런 판타지 같은 ‘유사 소년’의 시간을 벗어나 다시 현재의 자신으로 돌아올 때는 약간 쓸쓸해지기도 한다. 그때 그 시절이 너무도 아득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그리고 오늘 또하나의 즐거운 경험이자 기억은, 맥줏집에서 나올 때쯤 절친 중의 절친 광식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 하나가 횟집 사진을 카카오 단톡방에 올렸는데, 그 사진 속 내 모습을 확인한 광식이가 전화했던 것. 너무너무 반가웠다. 다짜고짜 ‘어디냐’부터 물었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헤어져 약사 친구 상훈이와 나 둘이서 광식이가 있는 ‘숙이네’로 향했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걸었다. 광식이는 쌍둥이 동생 진식이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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