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그녀는 내 정서의 약한 고리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본문
사진작가 서은미 후배와 점심을 함께 했다. 그녀가 점심을 먹자고 연락을 해올 때는 무언가 나에게 부탁할 게 있을 때다. 그걸 알기 때문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오케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최근에 의뢰받은 일들이 많기도 하고,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가 아닌 경우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작업의 성과 역시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서 작가는 7월에 발간할 예정인 ‘강화 화문석 장인의 삶’을 아카이빙(archiving)한 자신의 책 서문을 부탁했다.
재작년 ‘강화 소창 장인의 삶’을 책으로 발간했을 때도 내가 서문을 써주었는데, 그때 자신이 해왔던 작업의 의미를 너무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글을 써줘서 놀랍고도 고마웠다는 인사를 받은 바 있다. 사진 분야는 문외한이라서 처음에는 청탁을 거절했지만, 사실 그녀가 원한 것은 사진 미학에 바탕을 둔 분석적인 글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것들의 애잔한 역사를 기록해 온,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인정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그녀의 인정욕구 속에 담긴 고민과 작업의 의미에 공감했기 때문에 부탁을 수락했던 것이다.
이번 강화 화문석 장인을 다룬 사진 작업 역시 지난번 소창 장인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져가는 것의 애잔한 그림자를 사진에 담는 작업에 집중해 왔다. 앞서 말한 소창 장인의 삶은 물론 숭의동 Yellow House 여성들의 삶, 그리고 최근 작업 중인 일진전기 건물의 아카이빙 등 그녀의 카메라 렌즈가 겨냥하고 있는 피사체들은 모두 머잖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운명에 처한 것들이다. 그런 그녀의 한결같은 고집이 미쁘게 여겨졌기 때문에 사진을 잘 모르면서도 나는 그녀의 부탁을 번번이 수락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 글을 써주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글쓰기는 부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사진과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특히 환금성과는 거리가 먼 작업을 평생에 걸쳐 놓지 않고 견지해 온 장인들의 고집스러운 삶을 통해 예술가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시를 쓰는 나에게 그러한 자세는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 장인의 고집은 예술가, 시인의 근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나는 믿는다.
서은미 작가는 이런 나의 믿음이 청탁 상황에서 승낙을 얻어낼 수 있는 내 정서의 약한 고리(혹은 빈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인간적인 정 때문에 너무 쉽게 상대의 제안을 수락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청해 오는 그녀의 부탁을 번번이 수락해 왔으니 말이다. 그녀가 사준 칼국수와 맛있는 자몽에이드, 그리고 더치 커피를 먹었으니 이제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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