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한중일청년작가회의 : 하버파크호텔 본문
[기조 강연]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ㅣ 최원식
먼저 인천이 동아시아문화 도시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열리는 이 회의에 참석해 주신 세 나라 작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요즘 세 나라 또는 세 정부 사이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민제’(inter-civic)에 유의하여 우리의 초청에 기꺼이 응답하신 데 대해 더욱이 감사합니다.
이번 회의를 준비하면서 ‘청년’을 강조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청년의 위기가 전경화(前景化)했습니다. 오랫동안 사회 변혁의 명예로운 전위였던 청년이 어느 틈에 뒤로 물러선 것인데, 그 탓인지 그들의 문학도 갑자기 낯설어졌습니다. 거의 근대 문학의 집으로부터 가출 상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앞 시대의 정전(正典)들과 단절됩니다. 듣건대 일본도 중국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사하다는 것이매, 이번 인천 회의를 세 나라 청년 작가 중심으로 꾸리는 것도 보람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낡은 신은 사라지고 새로운 신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이 회색의 때야말로 우리 각자가 각각 자신에게 문학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일 수 있을지를 실존적으로 물을 절호의 시점일지도 모릅니다.
‘청년’은 근대일본의 조어(造語)입니다. 1880년 오사키 히로미치(1856~1938)가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를 기독교청년회로 번역하면서 청년은 탄생했습니다. 한국과 가까운 규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그리스도교 원류의 하나인 ‘구마모토밴드’의 일원입니다. ‘밴드(band)’란 “특정한 종파라기보다는 신앙적 일체감을 가진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자신들의 신앙을 일종의 서약의 형태로 표명했던 젊은이들의 결맹(結盟)”으로 구마모토밴드는 우에무라 마사히사(1858~1925)를 배출한 요코하마밴드, 우치무라 간조(1861~1930)을 배출한 삿포로밴드와 함께 3대 밴드로 일컬어집니다만, 정지용(1902~50)과 윤동주(1917~45)가 유학한 학교로 더욱이 한국에 알려진 교토의 미션스쿨 도시샤대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일본기독청년회의 조직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데에서 짐작되듯, 그는 일관되게 교회 일치의 신앙을 견지했습니다. 특히 그의 「정교신론」 (1884)은 정치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교회라는 이상에 입각해 인민을 군주와 정부의 소유물로 보는 천황제 절대주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적 시민사회를 내다봤다는 점에서 전후에 더욱 높이 평가된 문헌입니다. 한마디로 청년의 탄생은 아름답습니다.
오사키 히로미치는 청년을 어디에서 인용했을까? 흥미롭게도 당시(唐詩), 장구령(678~740)의 오언절구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거울에 비춰 백발을 보다)」이 출전입니다. 당의 전성기를 이끈 재상으로 현종(玄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뒤에 간신 이임보에게 탄핵되어 방축된 장구령은 일찍이 안록산의 난을 예견하고 간언한 충신입니다. 이 시의 전문을 잠깐 봅시다.
宿昔靑雲志(숙석청운지)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었으나
蹉跎白髮年(차타백발년) 우물쭈물하는 사이 백발이 되었네
誰知明鏡裏(수지명경리) 그 누가 알겠는가 맑은 거울 속을
形影自相憐(형영자상련) 나와 내 그림자가 서로 가여워하는 것을
아마도 낙백(落魄)한 후기 시로 보이는데, 첫 구의 ‘청’과 둘째 구의 ‘년’을 맛추어 ‘청년’을 조합한 것입니다. 그 발음만큼 뜻이 상쾌합니다.
청년은 청년운동과 함께 일본, 한국, 중국을 석권합니다. 구마모토밴드의 일원으로 오자키의 청년에 공감한 도쿠토미 소호(1863~1967)는 평민주의를 내걸고 자유 민권 운동에 투신한 한편 일본의 첫 청년 잡지 「청년사해」(1886)를 간행함으로써 그 빠른 정착에 기여했습니다. 그런 소호가 청일전쟁(1894) 후 국권론으로 돌아 제국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지독한 역설이지만, 청년은 바다를 건너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조선의 계몽주의자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는 모토 아래 잡지 『소년』(1908~11)을 창간했습니다. ‘소년’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그 직접적 유래는 단재 신채호(1880~1936)가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1907)일 것입니다. 이태리동일운동을 다룬 이 책에는 마치니(G.Mazzini 1805~72)가 창립한 ‘소년이태리’가 등장합니다. ‘청년이탈리아당’으로 번역되는 ‘라 죠비네 이딸리아(La Giovine Italia)’는 비밀혁명을 지향한 카르보나리(Carbonari 숯쟁이당)에서 탈퇴한 뒤,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목적으로 마치니가 1831년 창설한 공화주의 민중 혁명 결사입니다. 그 저본인 양계초(1873-1929)의 『의대리건국삼걸전』(1902)에는 “「小年意大利」. Young Italy”입니다만, 이 책들에는 청년도 나옵니다. “"당의 근본이 이미 서매 응하는 자가 메아리 같아 학생으로부터 학생이, 청년으로부터 청년이 하여 그 결합의 속력이 전고에 일찍이 있지 않았더라.” 요컨대 이 소년은 바로 청년인 것입니다. 이러매 최남선이 『소년』을 창간했을 때 그 숨은 뜻은 마치니의 청년이탈리아당에 닿아 있었던 바, 그 씨앗이 3.1운동(1919)으로 폭발하고 그 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에 의해 한국 근대문학이 건축된 일은 주지하는 터입니다. 중국도 맹렬했습니다. 량 치차오의 ‘소년의대리’는 1915년 천 두슈(陳獨秀, 1879~1942)의 『신청년』으로 발전했습니다. 청년을 내걸고 창간된 이 잡지는 1917년 후스(호적(胡適) 1891~1962)의 「문학개량추의」로 중국 근대문학의 길을 닦았고, 1919년 5.4운동으로 중국혁명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간단한 개관으로도 청년이 한·중·일 세 나라에서 어떻게 운동 또는 혁명을 추동했는지 요해하게 되거니와, 또한 청년은 정치이면서 동시에 문화였습니다. 자유 민권 운동과 3.1운동과 5.4운동이 각기 세 나라의 근대문학을 발앙하는 데 기여한 바를 상기컨대, 한·중·일 세 나라에서 청년은 다른 사회의 도래를 선취한 문화적 폭발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런 청년이 최근 급속히 전위에서 이탈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사회적 역동성의 쇠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는 금언은 한국사회를 이끌어온 황금률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더욱 능력과 노력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근대적 약속이 빈 무지개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먼저 앓고 한국과 중국이 전철을 밟는 이 풍조에 속절없이 말려들게 되면 아마 세 나라 각 사회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물론 미래가 불투명한 것이 문학에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위기를 먹이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조금 불길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한국 속담 그대로 ‘억압의 이행’이 곳곳에서 목격됩니다. 독재에 저항한 앞 세대가 그 자리에 올라 오히려 청년의 상승을 억압하는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청년의 도전이 좀체 어렵습니다. 그러자 억울한 청년들이 나라 안팎의 약자들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요즘 세 나라 청년들 사이에서 비등하는 외국인 혐오는 그 대표적 현상의 하나이거니와, 이런 풍조의 확산은 세 나라 공통의 미래 또한 어둡게 할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세계의 축이 동아시아로 이동할 것이라고 동서의 유수한 지식인들이 입을 모은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그 축이 태평양 한가운데 풍덩 빠진 형국입니다.
이 출구 없는 교착상태를 돌파할 힘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궁리해도 결국 우리의 미래, 청년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앞 세대는 미래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청년은 다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다른 감각과 다른 사유로 다른 미래를 궁리하고 살아갈 청년들의 명예로운 의무를 부러워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갈등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최근 비등한 한·중·일 사이의 갈등도 내재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절차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한·중·일 세 나라는 서구만 바라보고 각기 달려왔습니다. 그러다가 ‘탈냉전시대’에 이르러 서서히 서로를 돌아보고 급속히 가까워졌습니다. 동아시아가 외재화에서 내재화로 급커브를 튼 셈인데 이 과정에서 갈등도 격화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칸트는 말합니다. “함께 생활하는 인간 사이의 평화 상태는 자연 상태(status naturalis)가 아니다. 자연 상태는 오히려 전쟁 상태이다. (……) 그 때문에 평화 상태는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더 깊은 내재화로 가기 위한 진통을 표시하는 최근의 자연적 분쟁상태를 고귀한 평화 상태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세 나라 청년들의 “몫 없는 몫”입니다.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 구호는 소문자 ‘나’의 직접 정치를 머금은 한국의 촛불혁명과도 상통합니다. 마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아기 부처의 사자후가 연상됩니다만, 도래할 유토피아에 ‘나’를 기꺼이 봉헌한 옛 혁명은 가고 ‘나’의 단독성에 기초한 새로운 혁명이 싹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미묘한 때 ‘냉전’을 6.25전쟁이라는 최고의 열전으로 겪은 인천에서 세 나라 청년 작가들이 모였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청년작가들의 대화 속에 언뜻언뜻 드러날 새로운 하늘들을 목격할 첫 독자가 될 명예가 벌써 기룹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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