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차악을 강요하는 사회의 슬픈 초상 본문
법무부장관 임명과 관련한 갈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임명을 지지했던 쪽이나 반대했던 쪽이나 같은 국민이라고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그악스럽게 대립하며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 어느 쪽도 상대의 말을 들으려하거나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가짜 뉴스는 독버섯처럼 양산되고 정보 획득에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획득한 정보의 진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사실(을 넘어 진실)인양 믿으며 자신의 분노와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사실 한 부서 장관의 임명과 그에 대한 호불호라는 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좀 더 본질적으로는 일그러진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태동한 이념의 갈등이 점층적으로 내연해오다 이번 사안을 계기로 생경하게 부각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계 제로의 정국 속에서도 우리는 어느 한쪽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은 선택인지 그른 선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끔은 상대가 옳은 주장을 하고 있지만 단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실 정치에선 피아(彼我)의 구분이 중요할 뿐 주장의 정합성과 진실여부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는 저마다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염치없고 사리사욕이 많은 정치인들의 입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은 단어들이 빈번하게 오르내리고 있는 역설을 보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
자유, 민주, 정의, 평화, 미래와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의로운 죽음과 희생들이 있어 왔는가. 역사가 강변하는 최소한의 진실에만 주목을 하고 귀를 기울여도 그러한 가치들이 정작 정치모리배들의 오염된 입에서 회자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가를 알 수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입을 통제하지 못한다. 아니 통제는커녕 그들의 아전인수나 견강부회의 논리를 검증해보지도 않은 채 뇌동(雷同)해 왔던 적도 많았다.
정치의 개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사실 우리 모두의 일상적 선택은 정치적 행위의 연속이다. 직장을 선택하거나 아이의 교육문제를 고민하는 것, 심지어 의식주의 형태를 선택하는 것 속에도 일정한 정치적 지향이 스며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기대는 것은 얼마나 적극적인 정치행위일 것인가. 따라서 나만 옳고 상대는 무조건 그르다는 배타적 태도만 아니라면 국민들이 저마다 정치적 선택을 하고 그것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대다수 양심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국민들이 모종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민의를 대변할 정치인을 선택할 때조차 “찍을 후보가 없어”를 지나서 “그 놈이나 이 놈이나 뭐가 달라”라는 냉소는 기본이고 결국 “그나마 덜 나뿐 놈을 선택할 수밖에”와 같은 자조로 자신의 소중한 선택을 갈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픈 사회의 초상(肖像)이란 말인가. ‘골라먹는 재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믿음과 소신을 가진 단 한 명의 후보, 단 하나의 정책, 단 하나의 상황조차 좀처럼 우리는 만나오지 못했다는 말이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어도 최악의 결과가 되고만 상황이 빈번하게 도래하고 차선(次善)조차도 없어 결국 차악(次惡)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현재 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생한 민낯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연히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은 팽배하고, 건강한 비판과 냉정한 성찰이 부재한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함량미달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생명이나 자당의 기득권을 위해 벌이는 더러운 전쟁에 자신도 모르게 ‘아큐(阿Q)’처럼 ‘참전’하게 되는 슬픈 현실……. 이러한 현실의 일차적 책임은 삼류 정치를 하고 있는 타락한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들은 정보를 독점하고 독점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릇된 마타도어를 생산하는 복마전의 술사들로 전락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인인 국민에게 표를 구걸해 당선된 주제에 당선되자마자 주인 위에 군림하려는 배은망덕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이러한 무뢰배 정치인들의 전횡과 일탈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최선(의 인물)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고 오로지 최악(最惡)과 차악(次惡)들만 넘쳐나는 저 욕망의 여리고성인 정치집단, 그들과 결탁한 언론, 그리고 그들의 뒷배가 되어주는 정치검찰, 정치판사들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목하(目下)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은 다시 또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앞에 서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구설수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 자격에 치명적인 흠결이 될 수 있는 법무부장관에 대해 판단(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각자가 지닌 정치적 선택일 것이고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차악으로 선택된 법무장관이 제대로 된 개혁을 통해 더 나쁜 적폐인 최악의 정치검찰과 판사들의 파렴치한 독주를 막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좌고우면할 겨를이 없다. 그러한 의미 있는 실천만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차악의 선택’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딱지를 그나마 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최선의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누구를 혹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해보는 것은 결코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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