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4월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하여 본문
4월이 되면 많은 이들이 습관처럼 인용하는 시 구절이 있습니다. T.S Eliot의 ‘황무지’ 중의 한 구절인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가 바로 그것이지요. 사실 ‘황무지’라는 시는 그리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가 결코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어들이 환기하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가 겨냥하는 주제나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시를 읊조리곤 합니다. 그 중에서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구절이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겪어온 한국현대사의 신산한 감정을 그 시구에 이입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 4월은 정말로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양민이 학살되어 기일이 같은 상주들을 무수하게 양산한 제주의 4.3항쟁이 그렇고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4.19가 그렇고, 가깝게는 몇 년 전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수장된 세월 호의 비극도 모두 4월에 일어난 비극들이지요. 물론 4.19의 경우 파렴치한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민 스스로 확인했던 승리의 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숨져 간 수백 명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 편이 먹먹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4월, 정말 많은 애먼 죽음들이 수천수만의 꽃으로 피거나 비와 바람에 실려 이곳을 찾아오는 시간입니다. 그나마 4.19때 희생된 죽음들은 민주영령이라 불리며 수유리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그들의 의기(義氣) 또한 정당하게 평가받긴 했지만 어린아이, 임산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도무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던 4.3항쟁의 경우, 죽음 이후에도 신원(伸冤)은커녕 죽었다는 사실조차 함구해야 했던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겨우 10여 년 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난 이후에야 그 진실의 일단이 공개되고 쉬쉬하던 죽음의 의미들이 비로소 명예를 회복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4.3의 의미를 폄훼하고 망자들의 명예를 짓밟는 몰상식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인사들이 한둘이 아닌 현실을 목도하노라면 4.3의 진실을 완전히 규명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쓸쓸한 확인을 하게 됩니다.
특히 지난 2014년, 수백 명의 어린 목숨들이 희생된 세월호 사건의 경우, 그들의 죽음을 모욕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아직도 버젓이 진행 중이라는 데 우리는 절망합니다. 국정의 총 책임자인 대통령은 아이들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천연덕스럽게 침실에서 10시가 넘도록 잠을 자고 있던 나라, 그 후안무치한 상부(上部)의 패덕(敗德)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은 물론 자신의 양심을 팔아버린 수많은 고위층들이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며 또 다른 거짓말을 양산하고 있는 나라, 이것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생생한 민낯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해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 사실들이 담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의미들을 사상(捨象)한 채 뭉뚱그려 하나의 과거사실로 박제화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억을 통해 우리가 모종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찰과 반성, 책임과 문책의 과정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없는 기억 행위란 그저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이고 미련일 뿐이지요. 일부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과 적폐를 지적(기억)하면 약속이나 한 듯 앵무새처럼 “정치보복”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수’라고 참칭합니다. 만약 진실에 등을 돌리고 부조리를 용인하는 세력,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만 할 뿐 자신들의 패덕에 대해서는 관대한 용렬한 인사들을 보수라고 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보수가 맞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 땅의 일부 함량미달 보수(保守)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수(補修)가 절박하다고 하겠습니다.
해마다 4월은 돌아옵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이 땅의 모든 꽃눈들이 열리는 봄과 더불어 4월은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꽃을 보면서도 4월의 죽음을 생각했고 내리는 빗물, 새들의 노랫소리조차 망자의 눈물과 울음소리로 치환해서 보고 들어왔습니다. ‘잔인한 4월’의 기억들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아픈 과거의 기억 속에서 청산해야 할 적폐들을 정확하게 변별하고 가려진 진실들은 올바로 규명하여 4월 본래의 밝은 기운들을 회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처의 치유와 새롭고 밝은 역사의 회복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4월은 더 이상 잔인한 달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과 희망의 꽃들이 만발하는 새로운 봄의 시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4월이 그 새로운 시작의 원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다시 또 반복하는 2018년 4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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