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내 친구 최병설 본문
고교 동창 김주용의 모친 빈소에 문상을 마치고, 그곳에서 만난 또다른 절친 병설과 돌아오는 길, 구월동 문화예술회관 근처 단골 주점 '갈매기의 꿈'엘 들어 막걸리 한 잔을 했다. 자주 보지 못했던 지난 1년 간, 특별한 변화 없이 지속되던 병설의 삶과는 달리 나의 삶은 참으로 소설 같았다. 그 소설 같은 이야기의 일단을 듣고 있던 친구는 무척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 표정에는 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려움에 처한 한 인간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담겨 있었다. 늘 친구들의 어려움에 토 달지 않고 선뜻 도움을 주어왔던 병설의 품성으로 볼 때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가끔 "아, 어쩌다가"라거나 "좀더 일찍 알았다면..."과 같은 탄식이 이어졌다. 그가 곤혹스러워 할수록, 그의 탄식이 깊어질수록 나의 이야기는 길을 잃곤 했다. 그의 딸이 대학입시를 준비할 무렵, 논술 시험 준비를 잠깐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딸은 다행히 다른 성적보다 논술비중이 높던 인하대에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딸 지윤이나 병설이, 그리고 그의 아내인 혜숙씨가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아이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함께 식사를 하거나 간단하게 술을 마시곤 했는데, 가정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내 눈에 병설의 가족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고 진심으로 부러웠다. 책임감 있는 아버지, 적극적이면서도 가정적인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 만들어내던 행복한 모습들.... 그리 큰 사업은 아니지만, 내실있게 사업을 유지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논현 택지를 구입해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 같은 주택을 짓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병설이는, 그러나 자만하지 않았고, 인정이 넉넉했으며 친구에 대한 배려가 깊은 친구였다. 그런데, 내가 이러저러하게 큰 일들을 겪으면서(물론 다른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긴 하지만, 대책없는 나의 너그러움 혹은 세상 물정 모르는 내 어리숙함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그 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 그와 맘 편하게 앉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어언 1년 만의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동창회 행사 때 오가다 잠깐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병설이가 술집을 나설 때, 나는 그곳에서 만난 다른 문화판 후배들과 한 잔 더하기로 했기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뜨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섰는데, 인주옥 앞 골목에서 그는 "기분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받아둬. 나중에 갚아." 하며 미소를 띠며 슬그머니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눈물이 핑 돌았다. 실제로 나는 당장 다음날 써야 할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꾸우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찌 이렇게 절묘하게..... 나는 거절하지 않고, "고맙다. 그냥 받을게. 지금 나는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야. 어려우면 뻔뻔해지거든." 하며 멋적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웃음을 보자 비로소 병설이도 다시 웃기 시작했다. 대리 운전을 불러 그를 보내고 다시 술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머니에 담긴 '것'을 꺼내 보니 십만 원짜리 수표 5장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금액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고마운 친구. 그렇다. 나는 고마워할지언정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미안해 하는 마음, 약해진 모습은 친구가 원하는 모습이 결코 아닐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눈물나게 고마울 뿐 미안해 할 필요 없는 친구. 병설이와 나는 그런 친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