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어쩌면 이 여름이 그리워질지도 몰라 (8-28-수, 맑음) 본문
오전에는 작은누나가 오셔서 "언니(큰누나)가 쓸 만하면 갖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래." 하며 매형의 유품인 시계와 팔찌, 목걸이와 안경 등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중 낡은 가죽 팔찌를 제외하면 모두 쓸 만한 것이어서 "그래요. 내가 쓸게요" 하고 물건들을 챙겼다. 멋쟁이였던 매형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시계는 독일제 '앤드류&코' 모델로 30만 원 정도 하는 제품이었고, 목걸리와 팔찌도 은으로 된 제품 하나 빼고는 모두 시장 좌판 위에서 살 수 있을 듯한 저렴한 제품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들 대부분은 중국 쇼핑몰 테무에서 하나에 1,500~2,000원 정도로 구매한 것들인데, 그것들과 매형의 목걸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경은 내가 선호하는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독서용 안경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받아 놨다. 얼마 전에 받은 티셔츠 2벌도 현재 잘 입고 있다. 아직 그 옷들을 입은 내 모습을 누나는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자신의 남편이 입던 티셔츠를 입고, 차던 시계와 목걸이를 착용한 내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어느 지인은 돌아가신 매형의 옷을 입고 나타난 나에게 "찝찝하지 않아?"라고 물었는데, 나는 "아니, 괜찮아"라는 대답 대신 정색을 하고 "그럼 버려, 아깝게?"라고 반문했더니, 상대방도 "하긴, 아깝긴 하지. 옛날에는 멀쩡한 옷가지들을 왜 다 태워버렸을까?"라며 내 반문에 담긴 생각에 수긍해 주었다. 무속에서는 고인이 애정을 가지고 사용하던 물건은 모두 태워버리거나 소지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그건 그 사람들의 믿음인 거고 나는 오히려 고인의 물건을 소중하게 간직하거나 대신 사용해 주는 게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매형은 나에게 친형 같은 존재였다. 형이 남긴 물건을 동생이 사용하는 게 저어될 게 뭐란 말인가.
오후에 안과에 들러 백내장, 망막변증 검사 등 정기 진료를 해야 해서 점심 식사하고 사무실에 나왔다. 안내 데스크 여직원이 "이제 나오시는 거예요?" 하며 씨익 웃었다. 마치 '팔자 좋으시네요' 하는 것 같았다. 나야 뭐 아무 때나 출근해도 상관없는 유연근무자(시간운용을 탄력적으로 할 수 있어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라서 '오늘은' 늦게 출근한 거지 팔자 좋아 그런 게 아니었지만, (물론 그녀도 내 신분을 알고 있다) 나도 그냥 웃으며 "오전에 일이 있어 지금 오네요" 대꾸해 주고 계단을 올라왔다. 마을교육담당관은 출장 중이고 노동특보 보운 형은 비번이라서 사무실에는 나 혼자였다. 병원가기 위해 사무실에서 나올 때까지 나혼자 음악 들으며 일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호젓함이었다.
오늘 오전은 정말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그런 걸 보면 여름이 꽤나 매너가 좋은 것 같다. 갈 때가 되니 미적거리지 않고 확실하게 뒷정리 중이라는 메시지를 주잖아. 물론 가는 듯하다가 미련을 보이며 밍기적거리는 계절의 몽니를 여러번 경험한 터라서 쉽게 믿을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9월이 가깝다고 가을의 척후들에게 틈을 내주는 걸 보면 이 여름이 분별없는 망나니 계절은 아닌 모양이야. 사랑스럽기까지 한 걸. 뒤통수 맞을 때 맞더라도 좋은 건 좋은 거지. 칭찬하고 싶어. 여름! 지금처럼 깔끔하게 길을 비켜주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내년 1월이나 2월쯤에 분명 너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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