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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장난스러운 혹은 예의 없는 (03-26-일, 맑음) 본문

일상

장난스러운 혹은 예의 없는 (03-26-일, 맑음)

달빛사랑 2023. 3. 26. 20:29

 

느긋하게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 혁재에게 전화가 왔다. "형, 연애는 잘하고 있어요?" 뜬금없는 질문. 뭔 시답잖은 소리냐며 타박했더니 "뭐 하고 계세요" 하고 재차 물었다. "그냥 있어. 그러는 넌?" 했더니 "H 선생님하고 술 마시고 있어요"라는 뜻밖의 대답. 그럴 리가, H는 당분간 술 마시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설사 마실 일이 있다고 해도 혁재와 단둘이서 술 마실 리가.... 의아해서 재차 물었더니 "그러면 바꿔줄게요" 하며 전화기를 누군가에게 넘겼는데, 수화기에서 들린 목소리는 후배 병균이었다. 살짝 짜증이 났다. 어디냐고 묻자 "신기시장 '이쁜네'에 있어요" 했다. 결국 예정에 없던 장난스러운 호출에 택시 잡아타고 신기시장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술상 위에는 막걸리 3병이 놓여있었다. 혁재는 전작이 있었는지 조금 취한 상태였다. 병균이도 나처럼 갑작스레 전화받고 막 나왔다고 했다. 둘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의 연애에 관해 물었다. 이야깃거리가 그리도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연애하게 되면, 굳이 묻지 않아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거라며 눈을 흘겨도 후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킬킬대며 짓궂게 질문했다. 마치 조선시대 포도청에 끌려와 문초당하는 죄인처럼 없는 사실조차 만들어 이야기해야 할 형국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술이 들어가자 나 역시 분위기에 편승해 가상의 연애 상황을 만들고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이를테면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하고 싶었던 행동들이나 상대에게 듣고 싶은 말들을 가정하여 마구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허, 참!

 

그런데 바로 그때, 정말 영화처럼 H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님, 저는 일요일인 오늘도 일 때문에 출근했다 이제 들어가요." 수화기 너머로 H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때 이 '웃음'에 주목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그러면서 다음 주에 있을 행사를 소개한 후 "또 연락드릴게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갑각스러운 전화에 반가움과 얼떨떨함이 교차했는데, 그때 화장실 갔던 혁재가 실실 웃으며 들어와서는 "형, H 선생과 통화했어요? 내가 형과 같이 있다고 전화했는데......." 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서 H가 통화하며 웃었던 거군'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후배들을 무척 사랑하지만, 원치 않는 이런 종류의 깜짝쇼 정말 싫다. 나는 물론이고 H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후배들의 의도나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깜짝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특별한 감정, 혹은 관계를 자칫 희회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특히 남의 연애에 관여하며 커플 매칭 매니저를 자임해선 안 된다.

 

취해서 졸고 있는 병균이를 먼저 보내고, 나와 혁재는 근처 막걸리 집에서 한 병씩 더 마신 후 헤어졌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리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지금까지 유치한 중딩들 같던 후배들의 행동이 자꾸만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조금 전 H와 다시 통화하고 나서야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다음번에 후배들을 만나면 오늘 같은 일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말을 꼭 전할 생각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민감하게 지켜줘야 하는 게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영화 <존 윅4>를 보며 두 시간 사이클을 탔다. 스포츠센터에는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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