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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10-15-土, 맑음) 본문

일상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10-15-土, 맑음)

달빛사랑 2022. 10. 15. 00:52

 

주말, 느지막이 일어나 미뤄뒀던 일을 했다. 협탁도 손보고(그래 봐야 시트지를 사다가 리폼한 것이지만), 빨래하고 청소하고 냉장고에 있던 반찬거리들을 모두 꺼내 찌개도 끓였다. 화초들 손질도 하고 물도 주고 30분가량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전형적인 가을하늘이 보기 좋았다. 각종 SNS에는 코스모스 핀 들녘의 풍경과 단풍 직전의 숲, 파란 가을 하늘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그 모든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간혹 “너무 예뻐요. 가까운 곳에 산과 공원이 있는데도 이렇듯 방안에 콕 틀어박혀 하릴없이 가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와 같은 간지러운 답글을 달기도 했다. 점심 먹고 헬스클럽에 들러 한 시간가량 걷다 왔다. 땀을 흘리면 확실히 상쾌해진다. 오후에는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총 6개 시즌)를 보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했다.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미국 정치계와 백악관의 추악한 민낯을 그린 드라마인데, 생각보다 흡입력도 있고 대사도 수준이 있어 상당히 재밌게, 감동적으로 보았다. 물론 허구이겠지만, (사실이라면 미국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괴물들이다) 현실 정치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씁쓸했다. 정치 괴물들이 어디 미국에만 있겠는가. 자다가 보다가 했기 때문에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 다양한 일들을 겪은 것 같았는데, 늘 그런 것처럼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생각나는 게 별로 없었다. 저녁나절 김정열 형, 장은준 등에게 전화를 받았지만, 집에 있었다. 정열 형이 만약 나오라고 불렀다면 외출했을 것이다. 문화예술회관에서 진행된 시민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근처 갈매기에 들렀던 모양인데, 내가 집에 있다고 하자 “쉬는데 미안해요. 나는 부평으로 넘어가 부평 술꾼들을 조직해야겠어요” 했다. 고맙고, 다행이었다. 은준의 경우는 술 마시자고 전화한 게 분명할 텐데, 또 ‘다행스럽게도’ 핵심은 말하지 않고 부수적인 일상들만 계속 늘어놓았다. 어느 시점에서 내가 “오늘 한잔할까?”하고 물어봤어야 하는데, 술 생각이 별로 없어 듣고만 있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미안하고, 다행이었다.

한밤중 책상 앞에 앉아 문득 나를 ‘나’이게 하는 것, 이를테면 현재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있을 거고, 남이 나를 규정하는 모습도 있을 것이다. 시인, 감수성이 예민함, 정 많고 배려심이 많음, 글쓰기를 좋아함, 좋은 친구가 많음, 아들이 있음, 형제간의 불화가 없음, 부모님의 아름다운 임종, 꾸준한 운동 등은 상대가 나에게서 발견해줬으면 하는 모습이고, 소심한 A형의 선택 장애자, 술꾼, 계약직 공무원, 유혹에 약함, 가난함, 이가 안 좋음, 눈이 안 좋음, 때때로 위선적임, 사랑에 미숙함, 오래된 불면증, 불안한 미래, 급한 성격 등은 떨쳐버리고 싶은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나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이겠지. 어찌 타인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현들조차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가라는 의미의 신독을 강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현재 나는 시인이고 서툰 사랑을 진행 중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좋은 시가 자주 찾아주지 않아서 고민이지만…….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었다. 이런 식탐도 내 모습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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