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투사가 되어 살다 간 열사의 어머니 본문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오늘 새벽 운명하셨습니다. 올해로 향년 82세. 35년 전 6월, 공권력에 의해 아들을 잃고 난 후 그녀의 삶은 파란(波瀾) 그 자체였습니다. 순박한 시골 촌부였던 그녀는 아들의 죽음 이후 본격적인 민주 투사로서의 길을 살아왔습니다. 아들이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민주화에 대한 꿈을 자신이 대신 이루고자 했던 것이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효심 깊은 아들을 잃은 엄마의 심정이 오죽했을까요. 하지만 그녀는 슬픔에 매몰된 채 눈물과 한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대신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부도덕한 권력과의 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사실 자식 잃은 엄마의 슬픔을 어떻게 쉽게 극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배은심 여사는 그저 자식을 가슴에 묻은 채, 입술을 깨물며 마음의 다짐을 했던 것이겠지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이 그처럼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야 했는지, 아들이 죽으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각성했을 겁니다. 슬픔이 투혼으로 변화는 시점이었겠지요. 그 과정에서 자신처럼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알게 되었고,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싸우는 동지들과 연대하여 한결같은 민주화 투사의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 그 모든 순간, 하늘에 있는 아들이 함께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은 그녀에게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을 겁니다.
이한열 열사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 투쟁의 현장에 나도 있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에서는 연일 대규모 집회가 벌어지고 있었고, 나도 이한열 열사와 같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열사는 연세대 5년 후배였습니다. 이후 교문 근처에 쓰러진 열사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얼마 후 죽음을 맞게 됩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그의 주검을 지키기 위해 사수대를 조직하여 병원 주변을 둘러싸고 경찰과 대치하던 그때의 상황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당시 나 역시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라서 열사의 비보를 듣는 순간 깨진 보도블록을 발끝으로 쳐내며 문득 집에 계신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하루아침에 삶이 바뀌어 버린 배은심 여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아들이 그리웠을까요. 그 모든 신산함을 꿋꿋하게 이겨내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죽음이 애처로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리운 아들과 만나게 된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훼손과 역사의 퇴행을 발본색원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은 후배로써, 동지로써 너무도 죄송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녀가 아들의 뜻을 오늘까지 이어왔듯 우리도 앞선 열사들과 작고하신 그분들의 부모님, 형제자매들의 뜻을 이어가야 할 겁니다. 남은 우리의 몫이겠지요.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고달프고 힘들었던 이곳의 삶은 잊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아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에 드시길 기도합니다. 울 어머님 만나면 안부도 전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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